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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조명] 우리 신문 ‘學而思’에 비친 학자들의 고뇌
[기획조명] 우리 신문 ‘學而思’에 비친 학자들의 고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2.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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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7 15:25:01
선생이자, 연구자인 학자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곳은 많다. 그러나 이 고뇌의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은 때로 시장의 환청으로 들려오기도 하고, 학자연하는 자들의 賣名 소리에 지나지 않다.

교수신문 10년의 시간 속에 침전된 목소리는 어떨까. 작지만 송곳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학의 폐부를 찌르고, 환부를 도려낸다. 메스를 잡은 손이 자신을 겨누기도 한다. 우리 대학을 둘러싼 학인들의 고뇌, 우리 신문과 함께 달려온 10년의 풍경!

1992년 4월 15일 창간호의 학이사 필자는 이동순 영남대 교수(국문학)였다. 시인이자 학인인 그는 이렇게 일성을 냈다. “학문은 남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믿거나 그대로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경박한 한담이나 논의의 밑천을 삼기 위한 것이 돼서는 더욱 불가하다. 모든 탐구는 스스로의 넉넉한 재량으로 커가야 하고, 집념어린 성찰이 여기에 바탕이 돼야 한다.” 이 교수는 눈앞의 현실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의 학문을 경계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 한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분별력조차도 갖추지 못하게 된다.”

겸손은 모든 학문 활동의 기본 소양

베버는 학자들이 ‘예언가’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지만, 이 교수의 전언은 정확히 10년의 시간 흐름을 뀄던 것 같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는 명명백백, 시비를 가릴 줄 아는 학문, 그것을 삶의 척도로 내세운 것이 바로 학자라는 것.

척도를 가슴에 품은 학자들의 야심은 투명하고도 깊다. 김교빈 호서대 교수(철학)는 1995년 3월 1일자(60호) 학이사에서 “나는 10여명의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10년 뒤 한국근대현대철학사를 써 낸다는 꿈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런 야심찬 고백만 있는 건 아니다. 안석교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1995년 4월 18일자(63호) 학이사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고민을 풀어놓았다. “나에게 학문적 자신감이나 자기 신뢰는 단순한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이 고백은 ‘생동하는 인간’에 학문의 중심이 가닿아야 한다는 신념과 “부단한 문제제기는 우리를 자만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고, 겸손은 모든 학문 활동의 기본 소양이 될 것”이라는 정진의 자세로 되돌아간다.

이런 생각은 학자들의 자성의 목소리로 자주 되뇌어졌다. 박노영 충남대 교수(사회학)는 1999년 6월 21일자(159호) 학이사에서 자신을 ‘오십줄의 바보’라고 꾸짖으면서 “좋은 세상 만들기를 지향했던 나의 공부하기는 영 지지부진이다. 이제는 앞 세대에게 책임을 전가할 나이가 지났다는 자각, 이제 스스로 책임을 추궁당할 나이가 됐다는 자각과 더불어, 나를 진정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지지부진함이다”고 경계했다.

이런 학자들의 마음가짐과 야심 혹은 겸손이 대학을 견인하지만, 틈새는 있게 마련이다. 왜? 스스로 청맹과니가 되기 때문이다. 유초하 충북대 교수(철학)는 1997년 2월 3일자(105호) 학이사에서 이 학자 집단의 묘한 기류를 적확하게 지적했다. “때가 되면 학연·지연에 얽매여 ‘내 사람’을 뽑으려고 암투를 벌이”고, “동종번식의 누적을 통해 우리 자신이 속한 대학 사회를 열성집단으로 만들어가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고 ‘내부’를 질책한 것.

뼈아픈 내부 질책은 다른 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내 마음에는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 1997년 12월 8일자(126호) 학이사에서 이우붕 경북대 교수(화학)는 ‘根深枝茂’라는 화두를 던졌다. 무슨 뜻인가. 제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흉내내는 고약한 버릇이 우리 안에 있다는 칼같은 지적이다. “우리 학계의 논문들은 유행을 만들기보단 따라가는 경향이 농후하다. 즉 선진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분야의 연구에 편승해 ‘모방’ 또는 이와 흡사한 연구에 집착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서 “유행을 따라가는 연구는 한순간 화려해 보이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빛은 퇴색해버리고 만다”고 경고했다.

경고는 계속됐다. 건축학자 김동욱 경기대 교수는 2001년 10월 15일자 학이사(211호)에서 ‘퇴계’를 화두로 이런 생각의 집을 지었다. “현대의 학문이 제 각기 전문성을 내세워 각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얻어내고 있는 점에 대해 시비할 일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세분된 영역의 울타리 때문에 정작 중요한 본질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할 여지가 많다”며 학문간 대화를 호소했다.

투명한 삶의 척도, 준엄한 자기 질책

유초하 교수나 이우붕 교수, 김동욱 교수 모두 학문하기의 자세를 환기한다. 어떤 자세일까.

박설호 한신대 교수(독문학)는 올 3월 18일자(221호) 학이사에서 거듭 학자의 자세를 논했다.
한 시대의 투명한 지식인으로서 학자는 어떻게 자신을 세워야 할까. 박 교수는 미완의 서사시를 남긴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빗대 이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학문의 본질은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통용되는 가치관의 모순을 추적하고, 나아가 어떤 가능한 해결 방안 등을 제시하는 데 있다. 만약 지식인이 통용되는 가치관에 결탁하고, 이를 방조하는 기득권을 옹호한다면, 그는 학자로서의 ‘비판’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는 셈이다.”

상아탑의 지성, 학자이자 교사인 교수들의 고뇌는 서늘하기만 하다. 교수신문 10년과 함께 달려온 우리 시대 학자들의 목소리,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권력과 안일, 지적 불성실과 게으름으로부터 ‘추방’시켜 변경에 두려는 자기 검열자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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