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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원로 지성이 제기한 한국 대학의 과제
[특별기고] 원로 지성이 제기한 한국 대학의 과제
  • 교수신문
  • 승인 2002.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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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7 15:21:54
강만길 상지대 총장

우리 정도의 문화수준을 가진 민족사회가 20세기 초엽에 남의 강제지배를 받게 된 일도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지만, 그 때문에 우리 대학의 역사도 험난한 길일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는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까지도 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 다음으로 문화수준이 높은 지역이었으며, 고등교육기관을 가진 역사도 천년을 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시대 35년간 2천만 명이 넘은 인구인데도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하나밖에 없었고 나머지 고등교육기관은 몇 개의 전문학교뿐이었다.

그 때문에 해방이 되면서 고등교육에 대한 열의와 수요가 급격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데도 그 수요에 부응할 만큼의 대학을 세울 수 있는 재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국립대학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었고 사립대학, 그것도 운영비를 학생부담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립대학이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 점에 우리 대학의 태생적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겠다.

우리 대학의 어려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민족사회가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식 혹은 우리형의 대학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의 유일했던 대학은 서양식을 들여다가 제 식대로 만든 일본인의 것이었고, 해방 후에는 교육제도 전반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학제도도 그 일제식 잔재 위에 미국식을 도입해서 얹어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우리 대학제도는 우리에게 맞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불문하고 미국식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대학의 태생적 불행

근대적 대학제도는 물론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여 성균관제도와 같은 우리의 전통적 고등교육제도와도 일정하게 연결성을 가지는 우리 식의 근대적 대학을 만들 수 있어야 했는데, 근대사회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일본의 강제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여기에 우리 대학의 또 하나의 태생적 불행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최근 교육당국이 열을 올리고 있는 학부제 같은 것도, 대학원교육이 제대로 돼있을 때 학부제가 효과적이지 투자액이 절대 부족해 대학원 교육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우리 실정에서는 학부제가 오히려 학부 과정 교육의 질을 떨어뜨려 대학을 전문교육기관이 아닌 고등교양인 양성기관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실정에 맞는 우리 식 대학이 어떤 대학인가를 알아내고 그것을 위한 기틀을 차근차근 마련해 가는 일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립대학은 일반적으로 사회환원 차원에서 세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 대학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시대에 설립된 몇몇 전문학교 후신의 대학을 빼고는 우리 사립대학의 모두가 해방 후 임시교사 같은 데서 소규모 단과대학으로 시작했다가 순전히 학생등록금으로 커지고 커져서 종합대학이 되고 대규모 캠퍼스를 조성해 ‘학원재벌’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 등록금으로 이루어진 그 ‘학원재벌’의 총장 혹은 이사장 자리가 상속됨으로써 설립자의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지는 경우가 많다.

사립대학의 소유주가 뚜렷하면 다른 독지가의 재산 기증이나 투자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런 대학의 설립자는 말할 것 없고 심지어는 정부의 교육당국자까지도 사립대학을 사유물처럼 생각하여 설립자의 기득권 즉 ‘교주’의 소유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설립자 측의 학교운영 잘못으로 분규가 생겨 관선이사를 파견한 학교의 경우도 분규가 수습되면 다시 설립자니 ‘교주’니 하는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으니, 이쯤 되면 교육관료들의 상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 소득 1만 달러를 오르내리게 되면서 우리 사회에도 이제 기부문화가 조금씩 발달해 가고 있다. 대학에 대한 기부를 높이기 위해 모든 행정적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홍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기부 활성화를 위해서는 사립대학이 설립자니 ‘교주’니 하는 사람들의 사유물처럼 인식되게 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기부문화 조성도 대안될 듯

누가 소유주가 뚜렷한 남의 사유재산을 더 불려주기 위해 제 재산을 기부하려 하겠는가. 대학이 설립자나 ‘교주’의 사유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공공물로 인식될 때 기부행위가 성행될 수 있음은 상식이다. 우선 관선이사를 파견할 수밖에 없게 된 대학부터라도 건전한 시민단체를 운영하는 양식 있는 인사들로 정식 이사진을 구성하여 운영하게 함으로써 ‘시민대학’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 대학이 가진 가장 큰 취약점은 건학이념이란 것을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경우 확고한 운영철학을 못 가지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어떤 대학으로 만들겠다는 일정한 방향성이나 ‘철학’이 없다는 것은 대학들이 나름대로의 특성을 못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모든 사립대학이 그 재정을 대부분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대학이나 ‘돈벌이’가 될만한 학과만을 설치하게 마련이며, 따라서 대학 사이의 차별성이나 특성이 없어지게 마련이다.

최근에 와서 대학들이 각기 특성을 살려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그것마저 대학으로서의 학문적·교육적 특성을 살리려 하기보다 특히 지방사립대학의 경우 살아남기 위한 학생유치전략 차원의 특성에 한정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대학은 학문하는 곳이라기보다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이 급격히 퇴화돼 가는 것도 대학이 제 본래의 기능을 잃고 단순한 직업준비학교로 변해 가는 데 그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것은 또 건학이념이란 것은 허울일 뿐이고, 설립자니 교주니 하는 사람들이 직업준비학교가 아니라 대학이 될 수 있을 만큼의 투자를 할 수 없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우리 대학이 가진 가장 큰 어려움은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그 운영비의 대부분을 등록금에만 의존하고 있어서 재정상태가 말할 수 없이 빈약하며 그 때문에 국제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점이다. 2000년 현재 아시아 몇 나라 사립대학 운영의 등록금 의존률을 비교해 보면, 일본은 10.2%, 대만은 14.2%, 싱가포르는 16.8%인 데 비해 한국은 66.6%여서 그 차이가 너무 큼을 알 수 있다.

미래지향적 학문에 눈돌리자

그리고 1997년 학생 1인당 교육비투자액을 보면 미국 17,466달러, 일본 10,157달러, OECD 국가 평균이 10,893달러인데 한국은 6,844달러다. 최근 들어 한국의 대학들도 그 질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학원중심 대학 운운하지만 이 같이 높은 등록금 의존율과 낮은 투자액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대학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재정 확보가 우선돼야 하며, 그 때문에 최근 일부 대학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기여입학제를 주장하고 있는데, 수도권에 있는 몇몇 명문사립대학만을 살리고 나머지 사립대학을 모두 도태시키려 한다면 기여입학제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립대학도 전국에 고루 있어야 한다는 정책이라면 무엇보다도 사립대학에 대한 국고지원율을 높이는 일이 앞서야 한다. 아시아의 몇 마리 용이니 하는 나라들 중에서 한국 사립대학의 등록금 의존율이 부끄러울 정도로 높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넓게는 인류사회가, 좁게는 민족사회가 제대로 영위되기 위해서는 현실 생활에서 당장 직업을 얻기 위한 지식이나 기술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학문분야도 필요하며 그것을 대학이 맡아 하게 마련이다. 개인소득이 높아진다 해서 바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성은 적다 해도 미래지향적인 분야를 학문적으로 개척해 나감으로써 인류사회의 내일을 위해 공헌하는 민족국가가 곧 선진국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실정에서 대학의 질을 높이는 길은 국고지원을 획기적으로 높여서 대학의 사유성을 축소하고 공공성을 확대하는 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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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1933년 경남 마산生.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의장 역임. 2001년 3월 상지대 5대 총장 취임. 저서로 ‘조선후기상업자본의 발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근대사’, ‘현국현대사’, ‘20세기 우리역사’, ‘21세기사의 서론의 어떻게 쓸것인가’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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