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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사상검증
위험한 사상검증
  • 이기홍 / 강원대
  • 승인 2002.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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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이기홍 / 강원대·편집기획의원

큰일이다, 이념과 사상은 뼈 속에 스며들고 피 속에 흐른다는데… 나는 이미 10여년 전에 같은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로부터 보통도 아니고 ‘완고한’ 맑스주의자로 지목받은 일이 있으니. 시쳇말로 급진 좌경인사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인사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면 경제까지 위험하다지 않는가. 대체 이념과 사상이 그렇게 무섭고 힘센 것이란 말인가. 이 땅에서 번듯하게 행세하기는 애저녁에 틀렸다고 마음먹어야 할 모양이다.

하기야,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과의 선배 교수들조차도 나를 뽑기로 결정하고는 ‘이 者가 뿔 달린 붉은 괴물은 아닐까? 배우자와는 서로 마음이 안맞으면 갈라설 수도 있지만, 같은 학과 교수와는 그러지도 못하고 정년까지 으르렁거려야 하는데…’라며 걱정했다지 않는가. 그 분들이 걱정에 그치지 않고, 또는 걱정거리를 없애고자 ‘이 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더라면 아마 나는 밥을 굶고 있었을 (아니 죽었을)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분들의 이념과 사상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에게 정말 무섭고 힘센 것이 될 뻔했다.

내 이념으로 말하자면, 얘기는 복잡하지만, 맑스는 가장 뛰어난 사회과학자의 한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사상은 사회연구도 더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영양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인지 그 동안 이런 내 이념과 사상은 별다른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특히 요즈음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됨으로써 교수로서의 내 권력으로 지배할 수 있는 학생들마저 외면하여 학과 조교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폐강을 면치 못하는 처지가 됐다.

이렇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 이념과 사상이라면 아무리 아우성친들 무엇이 무섭고 무슨 힘이 있으랴. 내 자신부터 떠드는 데 지치기도 하고 밥벌이에도 별 도움이 안돼서 ‘부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 이념과 사상이 내 머리 속의 생각 전부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또 내 삶에서 차지하는 몫은 그것보다도 훨씬 적은 것이기 때문에, ‘전업’을 한다 한들 문제될 것이 있겠냐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도 큰일이다. 혹시라도 내 부업이 대박을 터뜨리면, 그것이 못마땅한 무섭고 힘센 사람들이 ‘사상 검증’을 하자고 나설텐데…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답하면 위험한 괴물이라고 난리를 치고, 바꿨다고 답하면 더 위험한 변절자라고 법석을 부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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