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3:00 (금)
[테마] : 한국 영화속에 그려진 강사와 교수들의 맨 얼굴
[테마] : 한국 영화속에 그려진 강사와 교수들의 맨 얼굴
  • 교수신문
  • 승인 2002.04.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4-17 14:39:42
박명진 / 영화평론가·가톨릭대 강사

‘풍경’을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상에 의해 선택되는 것, 또는 선택되어 온 것이라고 한다면(이효덕), 그것은 시각 주체에 의해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근대시기에 있어서 원근법과 시공간의 균질성, 또는 진보론적 시간관을 배경으로 탄생한 새로운 시각적 효과라 할 터. 근대적 주체 형성 과정에서 돌연히 튀어나온 피사체로서의 풍경. 선험적이고 관념적인 시각 주체의 시선이 새롭게 구성될 때 비로소 ‘풍경’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때, 20세기 후반과 21세기초에 발견되는 시간강사의 군상은 이 시대 또 하나의 ‘풍경’이라 할 만하다.

지식사회에 대한 삐딱한 시선들
물론 한국 영화사에도 ‘자유부인’(1956)의 태연(박암), ‘피아노가 있는 겨울’(1995)의 진우(강석우), ‘지독한 사랑’(1996)의 영민(김갑수) 등이 대학교수나 시간강사로 등장하는 예는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교수나 시간강사는 중세의 산수화가 그랬듯이 형이상학이나 주관적 시선으로 처리된 비사실적 재현이었다. 적어도 이들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균질적인 시공간을 돌아다니는, 또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질료로서의 ‘풍경’으로 발견되지는 못하였다.
이를테면 ‘자유부인’에서 교수직은 댄스홀, 양품점, 다방과 같은 근대 도시의 황홀경을 헤집고 다니는 부인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다. ‘피아노가 있는 겨울’이나 ‘지독한 사랑’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멜로물이나 광적인 사랑을 그리는 풍경화의 한 귀퉁이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한국 영화가-불완전한 상태이기는 하지만-하나의 ‘풍경’으로 교수와 시간강사를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에 와서부터이다.
우리는 그 ‘풍경’의 목록에 ‘강원도의 힘’, ‘세기말’, ‘아줌마’, ‘플란다스의 개’ 등을 올려놓을 수 있다. TV 드라마 ‘아줌마’를 제외하고는 대학사회나 시간강사의 문제가 내러티브의 핵심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목록은 최근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자 하는 카메라의 ‘광학적 무의식’을 한 꺼풀 벗겨내고 있다.
홍상수 감독은 지식사회에 대해서 삐딱한 시선을 보낸다.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소설가, 위성방송 PD, 그리고 대학생과 외도를 하는 시간강사. 홍상수에게 있어 지식, 또는 지식이 구축하는 관념세계, 그리고 이 관념세계가 쌓아올리는 진지함은 일상의 몸짓처럼 무의미하다. 세상은 우연과 반복되는 모방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
‘강원도의 힘’에서 시간강사 상권(백상학)은 이미 교수가 된 후배와 강원도 여행을 떠나고, 같은 처지의 선배와 함께 대학을 씹고, 일본 방송을 보고 있는 교수의 집에 양주병을 사들고 인사 간다. 그는 술집으로, 카바레로, 횟집으로, 강원도로, 교수의 집으로, 원서를 제출하는 지방대학교로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그러나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처럼 상권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향해 돌진한다. 이를테면 그의 영화들은 수컷이 명예와 성욕을 채우기 위해 부단한 탐색을 벌이는 모험담이다. 상권이 교수가 되었을 때, 선배 교수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섹스 빈도수에 대한 토론을 벌인다. 적어도 그는 대한민국에서 긴 방황을 끝낸 셈이다.
‘세기말’은 좀더 폭력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송능한 감독이 한국의 세기말을 점검하는 시선은 철저하게 80년대적이다. 세상을 절단하고 재배치하는 내러티브 욕망과 미장센의 무의식에 있어서 투박한 정치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투명해야 할 그 정치성에 90년대 말의 피로감이 덧붙여져서 카메라의 시선은 가끔 갈 길을 잃고 헤맨다.
시간강사 상우(차승원)는 세상을 씹는 재미로 산다. 유부남이면서도 처음 만난 여기자와 격렬한 정사를 나누고, 전망 부재의 역사를 강의실에서 외쳐댄다. 그는 교수가 된 선배를 만나 술대접을 한다. 그는 선배와 고환의 크기가 성욕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 선배로부터 찬조금 5000만원을 준비해야 한다는 충고를 전해 듣는다. 상우는 상권이 아니다. 상우는 2차 술자리 룸살롱에서 선배에게 주정 부리고 교수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아내로부터 이혼 당한다. 그가 강의실에서 우리나라의 근대 1백년사가 철저하게 실패한 역사이고, 이렇게 만든 ‘아비’를 ‘×할 놈’이라고 저주해도, 능멸 당한 대학과 지식인의 존엄성은 회복되지 못한다. 송능한은 상우의 입을 빌려, 이 사회를 이렇게 엉망으로 망쳐놓은 놈들이야말로 상우 같은 지식인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중얼거린다. 이는 무너지는 근대성, 또는 ‘물신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는 포스트식민 근대성’(최정무)에 대한 매몰찬 야유가 아니겠는가.

스산한 시대의 메마른 풍경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에 사는 시간강사 윤주(이성재)는 신경쇠약증으로 고통받는다. 어디선가 자신을 비웃듯이 들려오는 개짓는 소리. 그는 소음 발생의 원인이라고 규정한 강아지 한 마리를 아파트 옥상에서 던져버린다. 아파트 관리인은 죽은 개를 지하실에서 끓여먹고, 부랑자는 옥상에서 잡아온 개를 먹으려고 물을 끓인다. 개를 잃은 할머니나 어린아이들은 사방으로 개를 찾아 헤맨다. 아내의 경제력에 빌붙어 사는 윤주가 피해망상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교수가 되는 길뿐이다. 케이크 상자에 차곡차곡 돈 다발을 집어넣고 교수에게 바침으로써 그는 금자탑에 도달한다.(돈으로 세워진 탑이니 상아탑이 아니라 금자탑이 아니겠는가.)‘풍경’이 ‘풍경’다워지려면 이것은 균질 공간과 익명의 시선을 준비해야 한다. 상권, 상우, 윤주 등은 대학 근처를 배회하며 먹을 것을 찾는다. 운이 좋은 이는 썩은 고기라도 발견하지만 다른 이는 그것마저 구하지 못하고 허기를 느낀다. 이들이 찍히거나 그려진 그림은 이 시대의 ‘풍경화’인가. 말하자면 이들의 그림은 기존 문화를 세속화하고 개인적인 관조로서의 ‘세계’를 생산해 내는가.
어쩌면 우리는 대학 주변, 교수와 시간강사들이 그려진 ‘풍경화’를 관람하기 위해서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총체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사회와 역사의 징후를 드러내는 원근법적 구도는 아직 준비되지 못한 듯하다. ‘아줌마’에서 오삼숙이 장진구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댄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 시대의 표상 공간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근대 체제의 모순을 읽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