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18:10 (목)
시작하며 - 상아탑의 부도덕,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시작하며 - 상아탑의 부도덕,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2.04.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중기획] 대학,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세계화와 함께 대학에 불어닥친 시장논리는 경쟁제일주의를 기치로 삼아 지금까지 우리 대학이 추구해 온 이념과 가치를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 버렸다. 집중과 선택, 배제와 차별이라는 전략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한국 대학에 불고 있는 ‘황사’는 변화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고,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할 지에 대한 투명한 대화의 논리를 상실한, 시계불투명으로 비쳐진다.

변화의 필요성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마당이고 보면, 지금 대학의 고뇌는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진정한 자기 갱생의 노력을 담아야 한다. 낡은 습관과 조급증을 털지 않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질주한다면, 속도와 비례해서 거품이 양산될 것이며, 결국 자승자박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진정한 대학의 권위를 세우고, 시류에 허둥대지 않는 恒心으로 저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대학의 지혜를 세울 때다. 창간 10주년을 맞아 교수신문은 우리 대학이 뼈를 깎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결별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짚어보며 방향을 모색하는 기회를 마련한다.

①상아탑의 부도덕,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②남발되는 명예박사 ③강요되는 발전기금 ④도를 넘은 수익사업 ⑤편법운영 겸임교수 ⑥부끄러운 교육과정 ⑦로비장 특수대학원 ⑧믿지못할 업적평가 ⑨권위적인 행정구조 ⑩미로 속 재정운용 ⑪푸대접 시간강사 ⑫잡무와 신임교수 ⑬혹사당하는 조교 ⑭반복되는 임용비리 ⑮양심파는 표절 16.떨어지는 학위논문 17. 쏟아지는 학술논문 18.독단독선 법인권한 19.허명뿐인 대학홍보 20.입시에 동원되는 교수들

시장에 점령당한 아카데미…속물적 구태 청산 시작할 때

“학문이 효용을 갖게 되면, 그런 효용의 이용자는 학문의 장인 대학을 자기 목적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고, 자본이나 정부, 군부만이 아니라 대학 스스로도 거기에 편승, 부패하게 된다. 교육에서 연구까지도 상품화된다. 대학은 ‘교육공장’이 되고 학생은 이 공장에서 규격품으로 생산되고 기업에 팔려 나간다. 대학은 학생을 여러 수준의 사용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교육하는 기관이 되고, 팔리는 것은 대학이 아니라 수업료를 지불하고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대학은 ‘위탁 가공공장’으로써 가공 일을 맡은 기관이 된다.”

박우희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가 30년간의 봉직생활을 정리하면서 내놓은 ‘대학 거듭나기’의 한 대목이다. 노 경제학자가 경제적 관점으로 풀어낸 이 쓴소리에 대해 작금의 대학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도 조금 심하게 대응한다면 이런 내용쯤이 되지 않을까. “경도된 시각으로 대학의 변화를 호도하고 있다.” “학문이 효용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데, 기업이 원하는 학생을 길러내는 것은 현대 대학의 임무인데 무슨 소리냐.”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고 있는 대학의 몸부림에 찬물을 끼얹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대학은 힘들다.”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말도 안되는 논리라는 알레르기 반응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진리의 ‘상아탑’인가, 자본의 ‘바벨탑’인가

그런데 어쩔 것인가. 박 교수의 메시지를 곱씹으며, 현재 대학의 풍경을 오버-랩 하다보니 여러 부분이 겹쳐진다. 바로 근자에 대학들이 벌이고 있는 부도덕한 행태이다.

그 첫째는 대학권위의 추락이다. 대표적인 예가 부쩍 늘고 있는 명예박사 학위의 남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은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능력과는 무관하다며 블레어 총리와 대처 전 총리의 명예박사 학위 요구를 거부했다. 블레어 총리는 모교 출신임에도 옥스퍼드대학으로부터 학위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대학들의 명예박사 학위의 무게는 너무도 가볍다. 최고의 대학을 자임하는 서울대의 첫 명예박사 학위는 ‘더글라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두 번째 학위는 ‘쟌 R. 하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주어졌다.이들 군인들에게 주어진 학위는 법학박사였다.

최근 들어 몇몇 대학에서는 한발 나아가 명예박사 학위를 팔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려온다. 재정난을 덜기 위해 돈을 받고 학위를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박사학위과정이 설치된 1백1개 대학 중 87개 대학이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는 2001년 현재 2천5백30건을 넘어선다. 이 정도면 도떼기시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수준이다. 대학의 권위를 대학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대학들이 직장인의 학업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운영중인 특수대학원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충북의 S대학 법인이사장을 지내다 교육부로부터 퇴출조치를 받은 최 아무개씨. 그가 이 대학을 인수하기 위해 창구로 활용한 것은 바로 특수대학원이었다. 무일푼이었던 그는 서울지역 주요 명문대학 특수대학원에 입학을 했고, 거기서 맺은 인연을 통해 이 대학을 인수했다.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 대학인수의 발판으로 특수대학원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국회의 국정감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이미 일부대학 특수대학원의 학위는 학위 취급도 받지 못한다. 시간만 때우면 누구에게나 주어지기 때문이다. 기업가, 정치인들의 사교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특수대학원의 현실이다.

두 번째는 과도한 시장주의다. 대학을 점령한 시장원리는 이미 진리의 ‘상아탑’을 자본의 ‘바벨탑’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대학가에 불기 시작한 주차장 유료화 사업은 그 좋은 예. 본래 무질서한 캠퍼스의 환경개선을 위해 시작됐지만 그 취지가 퇴색된 지는 오래다. 이 사업은 이제 대학들이 포기할 수 없는 주요한 돈벌이 수단이 돼 버렸다. 넓은 캠퍼스를 확보하고 있는 지방대까지 주차장 유료화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대학 캠퍼스는 사색의 쉼터가 아니라 주차장이 되고 있다. 때문에 대학 안팎의 원성은 높아만 간다. 도대체 누굴 위한 대학이냐는 것이다.

몇해 전 서울대의 임시직 근로자들의 파업사태는 대학에 불어온 과도한 시장주의의 폐단을 여실히 보여줬다. 학교 운영의 경상경비를 줄이기 위해 서울대는 수 년 전부터 학교시설물 관리를 용역업체에 맡기고 있다. 캠퍼스의 잔디를 다듬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에서부터 주차관리까지 용역업체가 담당하게 됐다. 직접 사람을 고용해 쓰다보니 인력관리가 어렵고, 인건비 지출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 대학측의 설명. 그런데 용역업체들이 캠퍼스 관리를 맡고부터 근로자들의 인건비가 턱없이 깎이고, 근무환경이 매우 열악해졌다. 적어도 1백만원을 웃돌던 인건비가 최저생계비에도 모자란 30~40만원으로 떨어졌고, 그나마 수개월씩 적체되기가 일쑤였다. 이에 반발해 용역근로자들은 서울대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서울대는 전권을 용역업체에 맡겼으니 업체에 가서 따지라며 나몰라라 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 서울대가 국민을 상대로 고혈을 짜내는 형국이 벌어진 셈이다.

세 번째는 지나친 속물주의다.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대학의 속물근성도 부도덕한 행태의 하나다. 우선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대우가 그러하다. IMF 사태 이후 부쩍 늘고 있는 겸임교수들의 강단진출은 학문후속세대들의 위치를 더욱 흔들고 있다. 겸임교수제는 현장전문가들의 현장지식을 강단에 옮겨와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취지였지만,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질되고 있다. 대학강사들에 대한 푸대접도 대학의 속물적 근성의 표본이다. 대학교육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명함은 여전히 ‘대학의 파출부’다. 대학은 지금 생계비에도 모자란 강사료로 그들의 값진 땀을 짜내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돌아보면 대학의 부도덕한 행태는 대학운영 전반에서 나타난다. 생존을 위해 발전기금이 공공연히 교수들에게 강요되고, 학생모집난을 덜기 위해 교수들을 직접 입시현장으로 내몬다. 격에 맞지 않는 강좌들이 교양이란 이름으로 교육과정에 포함되고, 질 낮은 논문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통과된다.

대학이 넘지 말아야 할 ‘금기의 선’

물론 이를 대학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아직까지 상아탑의 권위를 지키고, 발전된 구조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넘지 말아야할 경계를 넘어선 대학의 부도덕과 몰염치, 그리고 속물적 근성이 빚고 있는 구태들이다. 현대 대학의 성격이 하나의 이념이 무너진 ‘멀티버시티’로 변모했다 해도 넘지 말아야 금기의 선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 선을 넘을 때 학문하고, 연구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의 존재는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서두의 박 교수의 메시지를 곱씹으면서 다음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왜인가. 지금 대학의 이성은 살아 숨쉬고 있는가, 대학의 정신은 어디쯤에 있는가. 현실론만이 대학을 배회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카데미안들이 이제 이 물음에 대답할 차례다.
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

함께 참여해 주십시오.
교수신문이 창간 10주년을 맞아 시작하는 연중기획 ‘대학,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는 독자분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기획입니다.
대학과 교수사회가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할 내용이나, 기획의 방향과 관련해 조언을 주실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독자분들의 참여가 이 기획을 더욱 알차게 꾸미고, 대학의 부도덕한 면을 하나씩 지워가는 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연락처 : 편집국 02-738-8769 이메일 : editor@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