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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정치주의로 환원하지 않아 … 대안적 주체 모색하겠다”
“문화를 정치주의로 환원하지 않아 … 대안적 주체 모색하겠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12.21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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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잡지’ 표방한 <문화과학> 60호, 편집인 심광현 교수에게 듣다

<문화과학>이 60호를 냈다. 관계자들 스스로가 ‘좌파 정기간행물’로서 장수를 누린 것은 행운이라고 말할 정도다. 어떤 동력이 이 잡지의 생명을 연장시켰을까. <문화과학>의 문제의식, 강조점, 앞으로의 구상 등을 편집인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미학)에게 들어봤다.

》 60호까지의 여정 가운데 기억할만한 사건이 있었을 거 같습니다. 방향성을 둘러싼 논쟁 등 말입니다.
“몇 차례 내부 논쟁이 있었는데 가장 격렬했던 것은 아마 창간 준비 과정의 논쟁이었을 겁니다. 92년 6월 창간호가 나오기 대략 8개월 전부터 강내희, 박거용, 이득재, 이성욱, 그리고 저 5명이 매주 편집회의를 하면서 잡지의 대상영역과 독자 및 명칭 등을 둘러싸고 격렬한 내부 논쟁을 했습니다. 대중문화나 일상문화 비평에 역점을 둔 대중지인가 이론적 지향이 뚜렷한 전문지인가, 유물론적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도 예술과 문화 영역에 집중할 것인가 문화와 과학기술의 상호작용으로까지 범위를 확대할 것인가가 주된 쟁점이었는데, 2002년 가을 급성간염으로 아깝게 요절한 문학평론가 이성욱씨가 전자를 주장했고 그에 반대해 제가 후자를 주장하며 몇 개월 동안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나머지 편집위원들도 초기에는 대부분 전자를 주장하다가 나중에 제 의견에 동조하게 되면서 잡지의 명칭도 두 문화의 만남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문화/과학>으로 낙착됐지요. 당시는 동구권 붕괴로 딱딱한 정치와 과학에서 부드러운 대중문화로 트렌드가 이동하고 있던 상황인데 시대의 ‘결을 거슬러’ ‘과학적 유물론’을 표방한 것도 부족해서 제목까지 <문화/과학>이라는 ‘어색하고 낯선’ 명칭을 들고 나온 것에 대해 주변에서 잘 알고 지내던 이들조차 ‘혀를 찼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또 많은 이들이 <문화/과학>이란 제목을 놓고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면서 어떻게 한 세기 전 신칸트학파 리케르트가 사용한 ‘문화과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느냐고 이의제기를 하기도 했지요. 그때마다 잡지 제목에 ‘/’가 있고, 표지에서도 ‘문화’와 ‘과학’을 분리시키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잡지사 제목이 ‘문화과학사’였기에 설득하기 어려웠던 기억도 납니다.”  

 

》 <문화과학> 창간호가 나온 뒤의 당시 풍경이 떠오릅니다. ‘과학적 문화론’을 표방했지만, 곳곳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과연 표방한 기치대로 ‘과학적 문화론’을 한국사회에, 그것도 좌파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제기했는지, 스스로 평가해본다면 어떻습니까?
“<문화/과학>은 동구권 붕괴 이후 문화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탈정치화가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를 경계하기 위해 문화 지형의 변동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체계적으로 시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정통주의’에 의해 배제됐던 그람시, 알튀세르,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영국의 ‘신좌파’와 버밍행 문화연구의 방법론, 80년대 미국의 <옥토버>지의 급진적 시각문화연구 방법 등 다양한 이론들을 ‘절합’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런 이론적 연구 방법들을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이런 방법들을 이용하여 한국의 문화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매호마다 이론 중심의 ‘특집’ 이외에 광고, 노래방, 화장, 패션, 대중음악, 일상공간, 홍대앞 거리분석 등을 다루는 ‘문화현실 분석’ 섹션을 두었습니다. 또 다른 잡지와 달리 창간 당시부터 1호에서 10호까지 한꺼번에 수년 치 ‘특집’을 기획했는데, 처음 10호 까지는 서구의 과학적 문화이론을 소개하는데 주력했다면, 11호에서 20호까지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층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특집들을 기획했습니다. 이후에도 이렇게 이론 분석과 현실 분석에 비중을 교대로 두는 방식이 60호까지 계속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난 20 여 년 동안 한국 인문학/문화연구의 역사와 대중문화 및 일상문화의 변천사를 연구하려 한다면 문화과학의 특집과 문화현실분석만 따로 떼어내 계열화하는 방식을 택한다면 그 전체 윤곽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집 세션이 지난 18년 동안 한국에서 서구 비판이론의 수용사와 진보이론의 화두의 변천사를 보여준다면, 문화현실 분석 세션은 대중문화와 일상문화의 실제적인 변화의 흐름을 조망하는 데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중심주의, 정치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대안을 찾기 위해 ‘비판적 문화연구’를 내세웠습니다. 상당한 성과도 올렸지만 ‘문화중심주의’ 아니냐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쎄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60회 분의 전체 목차가 60호 특집의 부록에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 특집 제목들만 일별해 보면, ‘문화적’ 이슈보다는 ‘정치경제학 비판’적인 이슈들의 비중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30호 이후에는 정치경제적 이슈가 주도하고 있어서 이게 무슨 ‘문화이론 전문지’냐는 이의가 더 많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30~40호 사이에서는 ‘문화’에 집중된 특집이 1회에 불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41호 이후에는 가급적 정치경제학 비판과 문화이론을 교차시키는 방식의 주제를 특집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필자를 구하기 어려워 내부 필자의 ‘강제 동원’으로 특집을 메우는 무리수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문학과 문화의 특수성을 강조하던 편집위원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화를 정치주의나 경제주의로 환원시켰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문화주의’만이 아니라 ‘정치주의’나 ‘경제주의’ 등 모든 형태의 환원주의를 비판하면서 문화-정치-경제 사이의 ‘단락’과 ‘불일치’와 ‘모순’을 탐구하고자 했는데, 이런 의도를 일관되게 지키면서 실제 글로 써나간다는 것은 정말 초인적 노력을 요하는 어려움을 야기했습니다.”

》사실 <문화과학>이 ‘좌파적’인 경향을 보이긴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등의 이론가들로부터도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에 연결시켜 부연설명하신다면.
“92년 창간 당시 우리의 이론적 준거점은 알튀세르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의 공백’은 60년대부터 알튀세르가 제기한 주된 화두였고, 알튀세르 자신은 그 공백을 스피노자, 프로이트, 라깡 등과의 조우를 통해 채워나가려 했습니다. 때문에 창간 당시부터 우리는 알튀세르가 멈춘 곳에서 출발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고, 그에 따라 그가 시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20세기 사상가들과의 조우와 ‘절합’을 특집의 연속적인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 들뢰즈/가타리, 네그리, 앙드레 고르 등과의 만남은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와 과학기술의 조우를 위해 그 외에도 비트겐슈타인, 칸트,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위상수학과 프랙탈, 과학사 연구, 그리고 세계체계론 연구 등에 시간을 할애해 왔습니다.” 
  
》 <진보평론> 최근호 “좌파든 우파든 생산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중소기업을 강하게 만드는 복지시스템이 한국(경제)의 나아갈 길이라는 문맥이었습니다. ‘문화적 활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지향하자는 입장에서, 이런 테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금융에서 제조업으로,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 중심으로, 내수와 단절된 수출에서 내수와 결합된 수출로의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변화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부분적 전환조차 대자본의 입장에서는 ‘불순한 혁명’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조중동’이 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격렬히 비판했던 것이 비근한 예이며, 오바마 정부가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대중은 소비문화에 중독-파편화돼 탈정치화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사회 변화의 동력인 대중의 힘이 이렇게 파편화돼 있는 한 중소기업 중심의 복지시스템이라는 ‘소박한 민주주의적’ 희망조차 현실화되기 어렵습니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현실화하려는 희망도 대중이 ‘축적과 소비’의 예속적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통치적 주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문화정치적 자기갱신과 상호갱신의 운동 없이는 백일몽에 그칠 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만일 이런 주체적 노력이 가능하다면 굳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찢어진 우산 안에 주저앉아 복지 시혜를 받는 대신 더 개방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안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대중에게는 장기적 이익이 될 것이라는 것이 ‘문화사회론’의 전망입니다.”

 

》<문화과학>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강조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그동안 30호에서 60호까지는 <문화사회론>의 이론적 틀을 거시적으로 가다듬고 그런 전망 하에서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점과 세계 자본주의의 동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주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현실적인 대안을 준비하고 실천해 나갈 대중적 주체의 구성에 관한 논의는 소홀했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생태적 문화사회’는 자본의 축적이 목적이 되고 인간과 자연이 그 도구가 돼 경쟁적으로 소진되는 자본주의 ‘노동사회’와는 다르게 모든 인간의 문화적 역능의 증진과 인간과 자연의 교감적 소통이 목적이 되는 사회이기에 그런 사회로의 이행은 현재의 대중들이 경쟁과 소외, 반생태적인 소비의 아비투스에서 벗어나 협동과 탈소외, 생태적 향유의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경유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타자와 공생하고 협동하는,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은 제도를 바꾸면 저절로 가능해지는 ‘자명한’ 것이 아닙니다. 61호부터는 이와 같이 자기-통치적이며 타자와 공생-협동하는 대안적 주체형성을 위한 자기교육과 상호교육의 과제와 방법들을 탐구하는 데 역점을 둘 예정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뤘던 대안적 예술과 인문학, 여성학과 과학기술학 연구에 당분간 더 많이 주력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행·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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