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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자연의 콩팥, 갯벌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자연의 콩팥, 갯벌
  • 김 준 전남발전연구원·연구원
  • 승인 2009.12.21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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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논에 벼가 자라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와야 땅이 제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눈에 보이고 당장 소득이 있어야 가치를 인정한다. 눈에 보이는 수확이 없는 갯벌은 이들에게 쓸모없는 땅이었다. 씨앗 한 톨 심을 수 없고, 공장 말뚝 하나 박을 수 없는 땅이었다. 시화호가 막히고 썩은 물이 바다에 검은 띠를 이루고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새만금 사업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거워지면서 갯벌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성직자들이 목숨을 건 삼보일배에 나선 뒤에야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갯벌을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림을 그리는 녀석들이 있다. 비단고둥과 갯고둥이다. 비단고둥과 갯고둥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하학에 가까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물이 들어오자 따개비들이 모두 입을 열고 열심히 먹이 사냥을 한다. 고둥과 따개비는 먹이 사냥을 하면서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를 만들어 낸다. 갯벌 여기저기에는 구멍도 숭숭 뚫려 있다. 칠게, 농게, 짱뚱어, 갯지렁이, 낙지가 사는 구멍까지 온통 구멍 천지다. 갯벌이 썩지 않고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모두 구멍 덕이다.

또 갯벌은 오염 물질을 걸러 내는 역할도 한다. 갯벌에는 바닷물 속 유기물만 먹고 깨끗한 물을 뱉어 내는 동물이 살기 때문이다. 바지락, 동죽 등 패류와 돌에 붙어 사는 따개비, 굴, 갯지렁이 등이 이들이다. 특히 갯벌에 사는 조개들은 하루에 5리터에서 10리터의 바닷물을 걸러 낸다. 갯지렁이 5백 마리가 하루에 한 사람분 정도의 배설물을 정화시킨다. 칠면초와 갈대 등 염생식물과 저서규조류, 미생물도 자정 능력이 뛰어나다. 펄 갯벌 1제곱킬로미터의 미생물 분해 능력은 도시에 있는 하수처리장 한 곳의 유기물 처리 능력과 같다는 연구도 있다.

‘갯벌의 청소부’라 부르는 갯강구, 왕좁쌀무늬고둥, 밤게 등은 죽은 갯벌 생물을 먹고 산다. 복잡한 유기물을 먹어 단순한 무기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갯벌 순환 구조를 완성한다. 육지에서 배출하는 각종 유기물은 갯벌을 거치면서 갯벌 생물들에 의해서 분해된다. 분해된 유기물은 갯벌 생물과 먹이사슬을 거쳐 최종 소비자인 인간의 새로운 에너지원이 돼 준다. 갯벌이야말로 ‘자연의 콩팥(the kidney landscape)’이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동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는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여실히 보여 줬다. 우리나라에서도 남해안에 큰 타격을 가한 태풍 매미가 어민들의 삶은 물론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파괴한 적이 있다. 쓰나미가 몰아친 동아시아는 해양 관광 중심지로 맹그로브 숲과 산호초가 군락을 이루는 곳이었다. 관광객이 모여들자 인간은 바다 숲을 모두 없애고 그 자리에 관광 시설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크고 작은 태풍에도 인간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바다 숲이 큰 에너지를 흡수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풍 매미가 남해에 큰 피해를 주었지만 지붕 기와 한 장 날아가지 않은 마을도 있었다. 방품림이나 마을 숲이 잘 가꾸어진 마을이었다. 숲을 베어 내고는 파도와 쓰나미를 막겠다고 시멘트로 큰 방파제를 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이미 여러 사례에서 확인되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 낸 큰 힘을 막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을 갖는 방파제를 쌓아야 하는데, 막는다는 것도 쉽지 않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이 때문에 파괴되는 갯벌 생태계 비용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자연은 그 자체로 조화롭다. 바닷물이 많이 빠질 때면 끝이 안 보이는 ‘개평선’을 이루는 서해 갯벌은 그 자체가 대형 방조제다. 갯벌을 지나오면서 거친 파도와 해일이 힘을 잃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갯벌은 집중호우에도 하천을 통해 급하게 바다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준다. 덕분에 지하수 고갈 방지는 물론 홍수 피해도 막을 수 있다.

갯벌은 이 밖에도 현대 과학으로 발견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가치, 미래 자원으로서의 가치 등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갯벌 자체에 고유한 권리가 있기 때문에 보전해야 한다는 ‘존재 가치’도 이야기되고 있다. 갯벌은 미래 세대에 전승해야 할 자연경관과 갯벌과 함께 살아온 인간들의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갯벌의 생산적 가치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측면도 새롭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김준의 갯벌 이야기』(이후, 2009)에서 저자의 동의를 구해 발췌 수록한 글입니다. 저자 김준은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저서에는 『갯벌을 가다』, 『새만금은 갯벌이다』등이 있습니다.

김 준 전남발전연구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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