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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와 21세기 오가는 인문적 통찰 … 誤讀은 번역의 숙명일뿐인가
조선후기와 21세기 오가는 인문적 통찰 … 誤讀은 번역의 숙명일뿐인가
  • 윤재민 고려대·한문학과
  • 승인 2009.12.21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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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저항과 아만』(박희병 지음, 돌베개, 2009)

박희병 교수의 『저항과 我慢』은 특이한 책이다. 이 책의 특이성은 여러 면에서 두드러진다. 우선 이 책은 조선후기의 시인 李彦王眞(1740∼1766)의 시집 『호동거실』을 평설한 책이다. 『호동거실』은 六言 한시 절구 170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다. 『호동거실』은 이언진의 문집인 『松穆館燼餘稿』에는 ‘동호거실’이란 제목으로 157수가 실려 있는데, 고려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松穆閣遺藁』에는 ‘호동거실’이란 제목으로 165수가 실려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동호거실’로 알려져 왔던 것을 ‘호동거실’로 ‘그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 준 것도 박 교수가 이 책에서 처음 한 일이요, 『송목각유고』를 새로 발굴하고 이 책에만 있는 시 13수와 『송목관신여고』에만 있는 시 5수를 더해 ‘호동거실’의 작품수를 170수로 확정한 것도 박 교수가 이 책에서 처음 한 일이다. 육언 한시 절구는 시 한 수가 六言句 4구, 곧 24자로 이루어지는 시이니, 170수라야 모두 합해 4천80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호동거실’을 평설한 이 책은 마지막 페이지 숫자가 476이나 되니, 그 분량부터가 벌써 통상적인 평설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비록 평설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이언진의 ‘호동거실’에 대한 단순한 평설이 아니라 이언진의 ‘호동거실’ 및 이언진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이며, 또한 이언진의 ‘호동거실’을 빙자해 이언진의 시대와 21세기의 오늘을 오가며 저자 자신의 인문적 통찰을 자유로이 구사한 독창적인 저술이기도 하다.

청대 비평가 김성탄과 이언진
책의 체재도 특이하다. 통상적인 서론, 본론, 결론이나 章節의 구분 대신에, 導論에 해당되는 내용을 ‘독호동거실법’으로, 평설의 본론에 해당되는 내용을 ‘독호동거실’로, 결론에 해당되는 내용을 ‘독호동거실후’라고 명명하여 전통적인 評點本 漢籍의 체재를 본뜨고, 그 각각의 내부 장절은 단순히 아라비아 숫자로 번호만 매겨서 구분했다. 이러한 특이한 체재는, 박 교수 자신의 해명에 따르면, 淸初의 비평가 金聖歎이 『수호전』과 『서상기』를 평설하면서 ‘독수호전법’과 ‘독서상기법’을 각 책의 평설 앞에 붙인 전례를 이은 것이다. 이언진은 김성탄이 평설한 『수호전』과 『서상기』를 애독했는바, 김성탄이 『수호전』과 『서상기』에 독법과 평설을 붙인 것처럼, 박희병 교수는 이언진의 글에 독법과 평설을 붙여 김성탄에 대한 이언진의 경의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셈이다.

내부 장절을 단순히 아라비아 숫자로 번호만 매겨서 구분한 것도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서술을 가능하게 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본론의 평설을 구분하는 숫자는 작품 번호의 기능도 하지만, ‘독법’과 ‘독후’의 장절 구분을 대신하는 숫자들은 아포리즘의 효과가 톡톡하다.

박희병식 독법의 두 가지 키워드
책의 제목도 특이하다. ‘저항’과 ‘我慢’이라니. 그러나 이 ‘저항’과 ‘아만’이야말로 박희병 교수가 이언진을 읽으면서 찾아낸 키워드이다. “이언진은 온몸으로 저항하며 시를 썼고, 저항을 통해 미적 가치를 창조해 냈다. 그러므로 ‘저항’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박 교수가 ‘저항’에 주목한 이유이다. ‘아만’은 좀 낯선 용어이다. “‘아만’이란 불교 용어로서, 자기를 믿으며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을 이르는 말이다.” 불교에서 아만은 부정의 대상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실 세계에서는 아만이 꼭 부정의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언진은 병적일 정도로 강한 자의식과 기괴하게 보일 정도의 높은 자존감,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 누구도 좀처럼 인정 않는 倨傲함을 갖고 있었다.” 박 교수가 ‘아만’이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한 이유이다.

“이언진에게 있어 저항과 아만, 이 둘은 분리할 수 없게 결합돼 있다. 그의 저항은 아만에서 나오며, 아만은 저항의 내적·심리적 원천이다. 만일 이언진에게서 아만을 제거해 버린다면 저항 역시 소멸돼 버릴 터이다. 이처럼 이언진에게서 저항은 아만과 떼어내어 생각하기 어려운바, 아만은 저항을 안받침하고, 저항은 아만을 정당화한다.” 박희병 교수가 이언진 독법의 키워드로 ‘저항’과 ‘아만’을 선정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 ‘저항’과 ‘아만’은 또한 박희병 독법의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게 서평자의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다가온 것은 이언진의 저항과 아만보다는 오히려 박희병 교수의 저항과 아만이었다. 그만큼 이 책은 페이지 하나하나마다, 아포리즘적인 단락 하나하나마다 저자의 개성이 짙게 배어 있다.
“이 독법은 나의 독법이다. 다른 독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텍스트를 왜곡하거나 오독할 자유는 없다.” ‘독호동거실법’을 마무리하면서 박희병 교수가 한 말이다. 이 책에는 기존 연구의 ‘오독’에 대한 지적이 적지 않다. 그만큼 논쟁적이고 자기주장이 선명한 책이다. 그러나 서평자가 보기에, 이 책 또한 ‘오독’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아포리즘적 단락과 평설의 오류
서평자의 책무 상 한두 가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32번 시의 번역과 그 평설의 문제다. 박 교수는 이 시를 행상이나 보부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보면서, “기예를 천시한 당대 사대부 계급의 관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언진의 적극적인 상업관을 읽고 있다. 그러나 서평자가 보기에, 이 시는 행상이나 보부상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라 당시의 왈자나 별감 무리를 묘사한 작품이다. 1구와 2구의 “짚신에 패랭이 쓰고(穿個鞋戴個笠) / 백리 길 두 장터를 잘도 다니네(閒走兩瓦三舍).”라고 한 번역은 “가죽신에 패랭이 쓰고 / 기생집들을 잘도 다니네.”라고 수정해야 할 것이다. ‘양와삼사’는 『수호전』에 나오는 ‘三瓦兩舍’란 표현에서 온 것인바 기생집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鞋’는 다른 판본에는 ‘혜()’로 돼 있는바 ‘가죽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의 1, 2구가 이렇게 번역된다면, 3, 4구의 “기예 하나 없는 건 부끄러운 일(一藝無成吾耳止) / 바둑이건 축구건 다 괜찮네(彈蹴毬皆可).”라고 한 내용은 이언진의 발화가 아니라 저 왈자나 별감 무리의 발화로 읽어야 할 것이다. 이언진의 적극적인 상업관은 적어도 이 시에서는 읽을 수 없는 내용인 셈이다. 67번 시에서, ‘시타(打)’를 ‘종 때리고’로 번역한 것은 부분적인 오역의 사례다. ‘시타(打)’는 ‘상타(相打)’의 의미로서 ‘서로 때리고’, ‘싸움박질 하고’ 정도로 번역될 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이언진의 노비 인식을 읽어내는 평설의 서술은 일정하게 교정될 필요가 있다.

吹毛覓疵 하다 보면 이외에도 더 많은 오독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의 숙명이다. “그 누구에게도 텍스트를 왜곡하거나 오독할 자유는 없다.” 박희병 교수의 이 말은 ‘의도적인’ 왜곡과 오독에 대한 지적으로 재해석돼야 할 것이다. 아무튼 『저항과 아만』을 읽는 즐거움은 이언진과 박희병을 동시에 읽는 즐거움이다.

윤재민 고려대·한문학과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조선후기 중인층 한문학의 연구』,  등의 저서와 『18세기 조선인물지 병세재언록』(공역)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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