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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술] 독일의 '主導文化' 논쟁
[해외학술] 독일의 '主導文化' 논쟁
  • 신진욱/독일 통신원
  • 승인 200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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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적-민족적으로 다양한 인구집단 사이의 문화적 통합이라는 문제는, 미국처럼 전통적인 이민사회, 혹은 프랑스와 같이 많은 식민지를 보유했었던 나라들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풍부하게 논의되고 심화되어 온 테마이다. 그러나, 이차 대전 이후 노동력의 국제적 이동과 일반적인 공간적 이동이 활발해짐과 더불어,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각 집단들의 문화적 자기정체성이 점점 더 발전되어감에 따라, "다문화 사회에서 집단적 정체성들 사이의 문화적 통합이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보다 심각한 방식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다문화 사회에서의 문화적 통합과 법적 인정

신진욱/독일 통신원, 베를린대 박사과정

이 질문에 대해 이제까지 제시되어 온 많은 대답들 가운데 우리는 최소한 세 가지의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는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서구사회에서는 "보편적 근대화와 토착적 발전이 일치"하는 데 반해, "세계문화와 민족문화 사이의 충돌"(뤼시엥 파이)을 경험하는 비서구사회는 나름의 방식으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시각이 있다. 둘째, "복합사회에서의 통합은 실제적 가치합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입법 및 권력행사의 절차에 대한 합의에 의해 가능"(위르겐 하버마스)해진다는 입장이 있다. 셋째, 인간의 정체성은 "중심없는 우연적 집합체"(리차드 로티)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통합적 문화의 창출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입장이 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대답을 각각 '일방적 동화론',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론', 그리고 '포스트모던적 다문화주의'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독일에서는 이 각각의 응답들이 서로 충돌하는 문화적 담론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독일의 보수정당인 기민련과 기사련은 다문화간의 문화통합이라는 난해한 질문에 대해서 갑작스레 대단히 도발적인, 그러나 그만큼이나 천박한 정치적 입장을 선언함으로써 독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이른바 '독일의 주도문화'라는 개념이다. 논쟁에 불을 당긴 것은 기민련의 원내교섭단체 대표 프리드리히 메르츠의 발언이었다. "오늘날 독일의 주도문화는 외국인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으며, 독일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독일의 주도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독일 보수세력이 자신의 중요한 정치적 레파토리의 하나로 등록한 '독일의 주도문화'라는 개념은 어떤 보편적 가치와 결합되지 못한 유아적이고 방어적인 민족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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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주도문화' 논쟁은 2002년 총리선거 및 연방의회 선거에서 좌파진영과의 차별점을 긋기 위한 '양극화 전략'의 일환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중도'를 표방하는 집권세력의 스폰지 같은 통치스타일 때문에, 보수세력은 이제까지 이렇다할 차별점을 찾지 못하고 정부의 개혁노선에 계속 끌려 다녔기 때문이다. 이번 논쟁에 연루된 정치적 갈등은 크게 문화통합, 이민정책, 난민법의 세 테마로 나누어진다. 이 각각의 테마에 대해 보수세력이 보이고 있는 기본입장은 문화통합에 대해서는 '동화', 이민정책에 대해서는 '제한', 난민법에 대해서는 '금지'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극도로 민족주의적인 노선이다. 이 가운데 일반적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민정책의 영역에서 보수세력은 좌파 정치세력 뿐만 아니라 재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압력 때문에 보수세력의 이민정책은 극단적 슬로건과 현실주의적 정책 사이의 가교를 발견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은폐하기 위해서 이들은 '독일문화', '조국애', '애국심' 등과 같은 모호한 구호들을 더욱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이와 같은 보수세력의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가장 공세적인 대항축은, 미국사회에 대한 이상화에 기반한 녹색당의 '다문화주의'(Multikulti)이다. 이 노선은 '여러 문화를 묶어주는 새로운 통합문화'라는 관념을 수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서로를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 자체가 가장 가치있는 문화적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이와는 달리 사민당 세력은 문화적 이슈를 피해가면서 법치국가적 원칙 하에서의 평등한 시민권 부여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차이의 인정' 혹은 '정치적 인정'은 문화적 통합을 위한 중요한 초석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새로운 공존의 윤리를 창출해낼 수 있는 최종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지금 독일인과 외국인 모두가 직면한 문화적 과제는 궁극적으로 '소통가능한 공통의 문화'라는 긍정적 통합의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양한 색과 형의 돌맹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멘트와 주형으로 서로 뭉쳐진, 모자이크와 같은 조합"(아미타이 에치오니)이라는 이상은, 민족주의를 훨씬 넘어서는, 그리고 다문화주의와 법치주의까지도 넘어서는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shingan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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