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1:30 (목)
학계 혼란 바로 잡는 노력의 산물 … ‘활용성’ 논의 이어가자
학계 혼란 바로 잡는 노력의 산물 … ‘활용성’ 논의 이어가자
  • 정해룡 부경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09.12.15 13: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의 ‘연구윤리지침’을 보고

지난 9월 말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이하 학총)는 지난 몇 년간 학계의 ‘뜨거운 감자’로 통하던 표절과 중복게재의 가이드라인을 담은 연구윤리 지침을 확정해 발표했다. 그동안  대학과 학술단체를 비롯한 연구기관들은 2000년 들며 불거지기 시작한 연구윤리위반 사례에 대응해 연구윤리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을 마련하는 작업은 주지하다시피 학문분야에 따라, 그리고 학술단체나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다른 글쓰기의 관행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기준안이 쉽게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개별 학회나 기관이 자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는 연구윤리지침은 대개가 규범적인 범위에 머물러 있고, 정작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표절(특히 자기표절)과 중복게재에 있어 명확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학총이 연구윤리지침을 마련한 것은 시의적으로 아주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중복게재에 해당하는 경우를 사안별로 정리하고 소급적용을 과감히 포기하자는 제안은 기존의 다른 윤리 지침과 구별되는 부분이다. 이번 학총의 지침 마련은 연구윤리와 관련된 학계와 사회의 혼란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국내에서 발표한 논문을 해외학술지에 다른 언어로 번역해 게재하던 관행을 분명히 금지하면서도 행여 우수한 논문이 국내 학술지에 더 이상 실리지 못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염려한 한민구 학총 회장의 인터뷰 기사(교수신문 11월23일자 4면)는 참으로 한국의 학계를 걱정하는 인간적인 면모로까지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학총의 지침이 ‘연구윤리지침’이라는 표제에도 불구하고 연구윤리 전반에 대한 지침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정계’와 ‘언론’에서 문제를 삼은 표절과 중복게재의 정의 및 판단기준 그리고 소급적용의 문제에 집중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금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이번 지침은 연구윤리 전반을 감당하기에는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지침에 대한 적용 및 최종 판정은 각 기관이 자율적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하면서도 학총은 이 지침을 학술단체와 연구기관에 내년부터 적용하도록 권고하고, 또 교과부는 “학회나 대학이 이번 지침을 어느 정도 반영했는지 평가해 지원할 계획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우선 학총이 말하는 중복게재의 개념은 폭이 너무 넓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지침 5. 표절 및 중복게재의 판정’에서 “하나의 논문으로 발표해야 할 내용을 여러 논문으로 고의로 나누어 게재한 경우”를 중복게재로 설명하면서도 “단, 연속 논문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논문 쪼개기의 관행 흔히, ‘살라미(Salami) 논문’이라고 부르는 이런 일은 동일한 논문을 중복해 게재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양심적인 글쓰기’에 해당한다고 보아야한다. 살라미 논문은 언제나 연속 논문을 가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기는 비교적 쉽지만 처벌하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위반이다.

또 ‘지침 6. 표절 및 중복게재에 포함되지 않는 유형’으로 “자신의 학술적 저작물의 내용을 연구업적에는 해당하지 않는 출판물에 쉽게 풀어 쓴 경우”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역시 ‘연구업적에 해당하지 않는 출판물’이 과연 무엇인지 애매한 표현으로서 이는 단체나 기관의 구성원들에 따라 얼마든지 같은 동일한 논문이나 책이 중복게재로 혹은 아닌 것으로 판정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학총이 ‘데이터 조작’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중대한 문제로 보인다. 한민구 회장은 “데이터 조작 문제는 법의 논리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연구윤리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 위반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기본 취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의 자체 노력으로 해결하지 않고 외부의 힘을 빌리겠다는 위험한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 연구윤리란 우리 연구자의 양심의 문제이지 법의 심판은 마지막 해결책이다. 예컨대 난해한 자료나 실험데이터 및 통계자료에 대한 해석과 분석은 전적으로 그 연구자의 연구역량이나 양심의 문제이고 그것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연구자의 자세를 바로잡는 학문적 토양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지 그것을 사법적 판단에 맡긴다는 것은 어딘지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아마도 이번 지침의 최대 쟁점은 적용시기일 것이다. 적용시기의 논란은 과거 우리의 관행을 범죄시 할 것인가 아니면 ‘사면’을 적용해 새로운 연구풍토를 만들 것인가에 있다. 학총은 2010년 1월 1일부터 적용하다고 명시함으로써 과거의 부정행위를 털어내고, 미래지향적으로 연구윤리의 정착을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겠지만 일단 ‘고뇌에 찬 결단’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 지침에 대한 적용은 각 기관이 자율적으로, “구성원의 합의”로 다시 말해 ‘알아서 해라’라고 한 발을 빼고 있다.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여러 기관의 기준이 들쭉날쭉하면 사회적 혼란만 야기시킬 것이다. 일반적으로 규정이나 지침은 법적 강제성이 수반된다. 이 지침의 활용은 사단법인 학총의 법적 지위와 연관돼 있으며, 이러한 지위와 권위는 위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고 또는 우리 학계가 부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적용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겠지만 이 차제에 학총의 지침을 근거로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 생각이다.

정해룡 부경대·영어영문학과

국교련 상임회장, 한국세익스피어학회 학술부회장을 역임했다. 부산인적자원개발원장을 맡고 있다. 『표절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