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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이고도 두려운 ‘1Q84’의 세계
매력적이고도 두려운 ‘1Q84’의 세계
  • 손종업 선문대·국문학
  • 승인 2009.12.1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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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_ 하루키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Q1-하루키 현상의 이유
이 짧은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다섯 가지 Q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상실의 시대』가 출판된 것은 1989년의 일이었다. 몇 가지 사건들이 이 소설에 후광처럼 드리웠다. 첫째, 베를린장벽의 붕괴로부터 도미노처럼 이어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이로 말미암은 미래에 대한 전망의 소멸. 둘째, 이에 따라 국내에서 1980년대를 휩쓸었던 공적 담론들이 일시에 퇴거해 버린 현상. 셋째, 1987년 이후 시민사회가 도래하는 한편, 고도성장의 결과에 따라 개인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됐다는 점. 요컨대 20대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망이 먼저 있었고 그 자리에 『상실의 시대』가 들어와 앉은 셈이다.
그렇다면 왜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엄밀히 말
하자면 Norway No Mori이니 이 제목에 대한 일련의 논쟁은 어설픈 것이다)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상실의 확인과 이에 따른 위안(“너만이 상실한 자가 아니다.”), 그리고 다시 상실의 전염(“네가 이미 잃어버렸으니 마땅히 그들도 잃어야 한다.”)이라 할 수 있다. 하루키는 상실의 교사자다. 그를 통해 상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하지만 모든 상실은 제로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의 대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실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하루키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하루키는 이미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것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명제화한 바 있다. 이 소박함에는 종교적인 그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그걸 느꼈지만 알지는 못했다. 그냥 『상실의 시대』를 읽었고 하루키의 교도가 됐을 뿐이다. 

Q2-왜 쓰는가
『상실의 시대』를 쓸 무렵의 하루키는 마흔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 『1Q84』를 쓰는 그는 60을 넘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저자의 나이를 느끼기란 어렵다. 사실, 『1Q84』는 기발한 발상에 의지한 소설이다. 『1984』의 빅 브라더에 대응하는 것으로 리틀피플을 놓는 것, 현실로서의 1984와 그것을 미궁으로 만드는 1Q84의 세계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시킴으로써 이 시대 젊은이의 세계감각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일단, 맨 처음에 이러한 발상은 우리를 압도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작가의 탄생을 목격하는 순간이 아닐까.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모종의 불쾌감이 떠오르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 깃든 낡은 감각들이 빚어낸 질투일 뿐인 것 같다. 그에 순종하는 일은 편안하지만 그를 거스르는 일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쾌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1Q84』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보자. 소설 속의 인물 아오마메는 예리한 얼음송곳으로 죄인의 내부를 파고 들어가서 죽이는 처형기계-잘 알려진 것처럼 이는 카프카의 소설에 등장하는 것이며 하루키의 전작 『해변의 카프카』의 핵심이기도 한데-인 반면에, 리틀피플은 우리 존재의 내부로부터 외부로 파열해 나오는 낯선 존재이다. 소설은 이들이 충돌하는 지점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맹목적이다. 요컨대 더 큰 세계에 대한 구조적인 탐사가 생략된 곳에 모든 질문들을 신비화하고 무력화하는 Q의 글쓰기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다.    
다시 묻자. 왜 쓰는가. 이 물음은 하루키는 누구인가란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전히 누군가는 그는 『상실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어하리라. 어떤 의미에서 그는 ‘공공의 적’이다. 그는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나태와 방황과 방종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에 비하자면, 소설 속에서 처형되는 자들의 죄악은 어딘지 편파적이다. 그들이 사랑의 죄인이라는 점을 환기하자. 거기에 여전히 남는 것은 60이 넘어서도 여전히 나이를 먹지 않는 소설가의 존재다.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 신의 자리에 있음을 뜻하지 않을까. 신체에 머물러 있는 신, 어떠한 외부도 지니지 않은 신이 추구하는 바는 불완전한 두 타자의 결합이 가져오는 잠정적 쾌락이다. 나는 어디선가 그러한 형태를 ‘생각하는 거시기(thinking phallus)’라고 명명한 바 있다.

Q3- 왜 읽는가
하루키를 읽는 일은 이러한 단순화와 강렬함 속에서 이루어지며 일련의 푸닥거리로 끝난다. 온갖 세상의 악을 하나로 단순화시키고 그것을 처형함으로써 순화된 느낌을 받는 일. 일본의 비평가 고모리 요이치에 의하면 그의 소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가해자로서의 죄의식을 극복하고 평화를 얻으려는 일본인들의 무의식과 공모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신전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하루키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한국인들의 삶에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한국적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에게도 하루키가 위안을 준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루키는 결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가 내세운 교리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가 아니라 “상대가 원하지 않는 성교는 폭력이다”이다. 이러한 철학은 에피큐리언을 닮은 것이되, 성애적인 것에 대한 과장과 인간됨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회피를 초래한다. 이게 하루키 소설의 내용에 관한 것이라면 그 형식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다. 그의 소설은 결코 깊이나 애매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게 오에 겐자부로와 그의 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여전히 대중을 위한 설교서다.

Q4- 왜 출판하는가
현 체제 속에서 모든 출판의 목적은 잉여가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왜 출판하는가라고 묻는 일은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상품가치를 예측하고 과감한 투자(선인세 10억)를 결정하는 것은 CEO적인 안목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독자들의 호응은 뜨겁다.  하지만 이 베스트셀러의 독자들 중에는 당혹감에 빠져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잘 팔린다는 사실이 한 작가의 위대함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문학동네> 정도의 출판사라면 이 ‘공기번데기’ 내부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를 따져 물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소설은 그들이 주장하듯이 ‘열린 텍스트’로서의 소설이 아니라, 아직 다 씌어지지 않은 소설이다. 독자가 개입할 여지보다는 작가의 무책임이 더 크다. 그렇다면, 이 미완의 출판이 지닌 의미를 따져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이 감상적인 연애담 형식 위에 기존의 판타지를 축조함으로써 조지 오웰의 『1984』가 지닌 진지한 구조들을 해체하는 소설이라면, 이 독서의 끝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루키 식의 ‘사랑의 종교’와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미묘한 상품성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문제는 하루키 선택이 한낱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지 않을까. 그와 접속하는 순간에, 작가에서 독자를 아우르는 한국문학의 지형에도 일련의 변형이 이루어진다는 사실. 

Q5-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제는 소중하다. 하지만 하루키에게서 이것은 너무 쉽게 성교의 문제로 축약된다. 반면에 그가 허물어버리는 것은 너무도 많다. 1984에서 1Q84로의 길은 사회학에서 종교로의 길이다. 아마도 두 젊은이가 하나가 되는 순간에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은 합쳐지리라. 이게 이 소설에 바치는 나의 예언서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성교를 절제하는 것 이상의 책임과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는 게 아닐까. 그것은 더 큰 구조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루키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 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는 무정부주의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그는 환각을 불러오고 대접해서 돌려보냄으로써 차가운 조직 속에서 개인들이 잘 적응하도록 치유하는 무당에 가깝다. 어찌 보면 우리를 그토록 놀라게 했던 1Q84의 마법도 그가 탄생한 일본어의 감각에서는 조금 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84를 ‘이찌-큐-하찌-욘’으로 읽는 사람에게는.  

손종업 선문대·국문학

중앙대에서 박사를 했다. <동아일보>를 통해 평단에 등단했다. 『전후의 상징체계』,『분석가의 공포』등의 저서가 있다. 한국문학과 근대성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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