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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휘날리는 터럭 한 올에 깊게 새겨진 것은 무엇일까
저 휘날리는 터럭 한 올에 깊게 새겨진 것은 무엇일까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09.12.07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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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는 두 가지 시선

이명기·김홍도 합작, 서직수초상, 비단에 채색, 148.8x72.0cm, 1796년. 보물 제1487호, 국립중앙박물관소장.(위 안면 세부, 아래 몸체 세부).
불변하는 진리가 하나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 인간은 삶은 유한하며 그만큼 덧없다. 이런 한계, 또는 덧없음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은 영정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찾고, 또 그렇게 남겨진 사진을 우리는 고이 간직한다. 그렇게 사진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이겨내고 망각에서 구원돼영원한 삶을 얻는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진이 없던 시절에도 인간에게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잊혀짐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수단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바로 초상화다. 물론 이 시대에는 아무나 그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소수의 지배계층 사람들만이 초상화를 남길 자격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진’의 보편화는 적어도 영생에 관한 한 거의 완전한 인간 평등을 실현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조상들은 어땠을까. 적어도 조선시대 왕과 사대부들은 초상화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미술사학과)에 따르면 현존하는 조선시대 초상화는 대략 천 점 정도는 될 것이라고 한다. 한 인물의 초상화가 대략 서너 점씩임을 감안하면 대략 사오백 명의 인물이 자신의 초상화를 남긴 셈이다. 또 그 대부분은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예술학부)는 이렇게 많은 초상화들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된 것은 옛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예술작품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조상, 선현 그 자체로 간주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란이나 병화가 닥쳤을 때 제일 먼저 신주와 초상화를 챙겼던 것이다.

이렇게 남겨진 초상화들은 어떤 모양새고 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리 초상화 연구의 권위자들이 집필한 두 권의 저서가 있다. 최근 출간된 조선미 교수의 『한국의 초상화-形과 影의 예술』(돌베게, 2009), 그리고 작년 말에 출간된 이태호 교수의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생각의 나무, 2008)가 그것이다.

사회문화적 분석과 카메라 옵스큐라

먼저 조선미 교수의 저서는 조선시대 초상화 전반의 흐름과 특성을 개관한 다음 초상화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조선시대 초상화를 왕, 사대부, 공신, 기로, 여인, 승려 등으로 분류하고 그 대표적 걸작 70여점을 고찰하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이 책은 초상화 주인공들의 활동상을 함께 소개해 인물사의 성격도 갖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시대 초상화는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 하에 핍진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대부분 享祀나 瞻拜용으로 제작된 초상화들은 외적 닮음만이 아니라 그 정신을 표현하는데도 주력했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조선시대 초상화들이 그 유형과 상관없이 인물을 ‘바람직한 성정’과 ‘반듯한 모습’으로 나타내는 경향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즉 이 그림들에는 어쭙잖은 개성에의 폭주, 가령 왜곡이나 변형, 과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각 작품에 대한 세부 설명도 흥미롭다. 예컨대 영조의 왕자 시절 초상화인 「연잉군 초상」과 51세 때 초상인 「영조어진」을 비교해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청년기의 영조가 자신만만하고 권위적인 노년의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을 관찰하고, 빠른 하관과 숱 적은 수염의 묘사로부터 변덕스럽고 깐깐한 영조의 성정을 읽어내는 대목은 비전문가들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또 이명기와 김홍도가 함께 그린 「서직수 초상」에 대해서는 정작 초상화 주인공 서직수가 당대에 “정신의 한 조각도 그려내지 못했다. 아깝다”라고 평했던 것을 인용하면서 “(서직수가) 평생 속되지 않음을 귀히 여기는 이른바 고매한 품격이 화면에 드러나기를 기대했기 때문 아닐까”라는 설명을 붙여 초상화에 대한 당대  사대부의 인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특히 주어진 조건이나 형식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변용된 화법의 구사에 주목한다. 예컨대 저자는 김진규의 작품으로 전하는 「송시열 초상」에서 보이는 대담한 구획(인물을 상당히 아래쪽에 배치하여 상부공간이 넓다), 강조된 양 어깨의 높이 차, 정형성을 벗어나는 의습처리를 높이 평가한다. 또 「강세황 70세 자화상」에 대한 서술에서는 옷차림을 통해 출사와 은일의 정체성(이름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있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주목한다.

조 교수가 주로 당대의 사회·문화적 문맥 속에서 초상화를 분석, 해석하고 있다면 이태호 교수는 ‘근대성’의 관점에서 18세기 조선의 초상화를 논하고 있다. 저서 전체에서 18세기 초상화에 미친 카메라 옵스큐라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태호 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후기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 광학 기기 카메라 옵스큐라와 이명기, 김홍도 같은 사실주의적 재현의지를 지닌 탁월한 예술가들과의 만남이 이 무렵 ‘과학적 사실주의’라 칭할 만한 수준 높은 초상화를 가능케 했다. 「서직수 초상」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에 따르면 카메라 옵스큐라의 활용과 과학적 리얼리티의 구현은 우리문화의 근대적 맹아를 살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는 19세기 남종화풍의 유행과 더불어 과학적 사실주의 전통이 쇠락하게 된 것을 대단히 애석하게 여긴다.

한편 우리 근현대미술에서 초상화 전통이 쇠락하게 된 것에 대해 이태호 교수는 사진의 출현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본이나 서양화의 인물화법에 매몰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해방 이후에도 18세기의 빛나는 사실주의 초상화 전통은 되살아나지 못했다. 이 교수의 해석에 다르면 조선 초상화의 걸작들은 “당대에 존경할만한 사람이 있었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쌓였기에” 가능했다.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인가.”

회화적 변용과 근대화로의 가능성
두 권의 저서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다. 그래서 두 저서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완하는 상보적 관계에 있다. 하지만 두 관점이 충돌하는 부분은 보다 조심스러운 독해가 필요하다.
예컨대 최후의 초상화 대가로 평가되는 채용신의 작업에 대한 견해차가 그렇다. 조선미는 황현의 사진을 모본으로 그린 「황현초상」에서 모본인 사진을 채용신이 회화적으로 변용한 것을 강조한다. 전체적으로 옹색하고 답답하게 보이는 사진에서의 황현과 달리 화가에 의해 변용된 초상화 속에서의 황현은 훨씬 당당해 보인다. 이로써 황현 초상은 그의 인품과 성정에 부합하는 사실성을 갖게 됐다. 이에 반해 이태호 교수는 채용신의 그림에서 과학적 사실주의의 발현을 높이 평가한다. 가령 그는 「곽동원 초상」의 눈의 묘사에서 채용신이 수정체에 흰색 하이라이트를 찍어 눈빛의 생생한 것을 표현한 것에서 근대적 초상화로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미술사가들의 몫이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후대에 어떤 방식으로 전할 것인가.”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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