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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철학의 이름으로 배제했던 ‘소수자’에 주목하다
좌파 철학의 이름으로 배제했던 ‘소수자’에 주목하다
  • 이순웅 숭실대·철학
  • 승인 2009.12.0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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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창립 20주년 기념 가을 학술발표회 참관기

지난 5일 건국대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가 창립 20주년 기념 가을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마르크스의 시선-세상이 변했을까’라는 큰 주제 아래 ‘여성, 북한, 권력, 문화-대중’이라는 세부 주제를 다룬 이번 발표회는 진보적 철학 연구자가 가져야 할 안목에 관해 고민해보는 좋은 기회였다.

발표 제목과 발표자, 논평자는 다음과 같다. 제1발표 「진보철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재구성: ‘차이’ 개념과 ‘주체성’을 중심으로」- 발표 연효숙(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 논평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 제2발표 「남북관계에 대한 반성적 고찰: 체제와 민족을 중심으로」 - 발표 이병수(경남대 연구교수), 논평 장은주(영산대 교수) / 제3발표 「현대 시민사회의 지배양식」 - 발표 이성백(서울시립대 교수), 논평 양운덕(고려대 연구교수) / 제4발표 「아방가르드와 마르크스주의: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사례를 중심으로」- 발표 박영욱(연세대 HK교수), 논평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왼쪽부터 이정은(사회), 연효숙, 이현재 교수. 진보철학자의 덕목을 고민한 자리였다.


제1 발표의 주요 내용은 진보철학을 여성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도입된 것이 ‘차이의 철학’이며 진보철학은 계급주체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주체성의 층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적 틀을 통해 재구성된 진보철학은 고정된 성 정체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소수자’를 고려하는 차이의 정치학이다.

진보철학을 여성주의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진보철학에서 여성 문제가 소외됐기 때문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끼워 넣는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의적 관점을 도입해야만 진보철학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표자는 진보 철학의 낡은 틀을 ‘해체’하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새로운 판짜기’(재구성)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적 진보철학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性差에서 출발하는가 아니면 성차를 비롯한 기존의 모든 정체성을 해체하는 데서 출발하는가가 또다시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이는 ‘소수적 여성주의’ 안에서 성차(여성의 정체성)와 폐쇄성을 극복하는 주체성을 확보하는 과제와도 관련이 된다는 것이 논평자의 지적이다.

발표자는 이리가레식의 본질주의로 ‘여성 주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자폐적 함정에 빠질 수 있다면서 후기구조주의 철학을 여성주의에 수용한 버틀러, 브라이도티, 그로츠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특히 그로츠식의 ‘뫼비우스 띠 모델’로서의 여성 주체성은 ‘분자적인 여성’으로 돼 자유롭게 생성 변화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여성 주체성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진보철학의 여성주의적 재구성은 기존의 성 정체성(남성이든 여성이든)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필요에 따라서는 전략적 본질주의를 취할 수도 있지만 큰 흐름에서는 ‘구성’과 ‘해체’가 상호 교차하는 식의 모델이 돼야 한다는 것이 발표자의 결론이다.

‘차이의 철학’ 통해 진보철학 재구성
제2 발표에서 논평자는 분단의 해악을 지적하면서도 통일을 지상적 가치로 여겼을 때 생길 수 있는 폐해, 예를 들면 북한을 ‘내부 식민지화’하려는 흡수통일이나 전쟁을 통한 통일 등을 우려했다. 그리고 남북한은 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반세기가 넘는 동안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과연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의 기반이 있는가도 물었다. 아울러 오히려 통일을 ‘쿨’하게 떠나보내는 역설이 분단체제 극복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발표자는 통일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분단구조가 만든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보다 나은 상태로 남북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동태적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의 과정에 방점을 둔 미래적 기획으로서의 통일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공통적 지반에 관한 문제는 민족적 공통분모 찾기에서 해법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민족적 공통성은 ‘차이를 단일한 틀에 용해시키는 동질성 개념’이 아니라 열린 개념이다. 과거의 전통을 바탕으로 남북이 함께 할 수 있는 측면을 부단히 확장시키되, 남북의 정치적, 문화적 차이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제3 발표는 현대 시민사회의 지배 양식에 관한 것이었다. 발표자는 마르크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람시를 현대 시민사회 지배 양식론의 선구로 본다. 마르크스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 자체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해명에 집중했지만, 이 관계를 유지하는 지배계급의 지배양식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람시의 시민사회와 헤게모니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론, 푸코의 미시권력론, 들뢰즈의 욕망의 영토화론 등을 지배양식론의 구성에 필요한 요소로 언급한다. 푸코와 들뢰즈 역시 지배체제에 동화돼가는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미시적으로 해부해 들어간 셈이다.

발표자는 지배양식론의 ‘구성’은 새로운 기획이니만큼 시론적 의미를 띤다고 말했다. 따라서 논평의 경우도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조언이 많은 편이었으며 (보편적인) 지배양식론과 저항 주체를 상정하기 위해서는 지배양식에 대한 해명이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4 발표는 소비에트 구성주의를 중심으로 아방가르드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해 다루었다. 발표자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마르크스주의 예술론과 동일시됐지만, 1990년 이후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아방가르드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수용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청산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수용은 문화나 예술이 경제적 토대의 반영이라는 수동적 지위에서 벗어나 아예 ‘최종심급’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발표자가 우려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할 경우 대중적인 문화현상과 상관없이 지식인들만 누리는 담론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나아가 마르크스가 경제에 부여한 토대의 궤적으로부터 이탈해 지식인들이 자기만족에 안주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파성과 모더니즘 예술의 새로운 형식성을 결합하고자 했던 소비에트 구성주의 역시 엘리트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논평자는 발표의 큰 틀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지를 훼손할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세밀하게 지적하였다.

폐해는 극복하되, 문제의식은 살려야
4개의 논문을 거칠게 분류하면 제1,2발표는 차이의 철학으로, 제3,4발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철학으로 나눌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제3발표는 지배양식에 대한 관심이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집중되면서 이와 관련된 경제적 지배양식에 대한 관심이 뒷전으로 물러난 것을 우려한다. 이는 피지배 대중이 지배체제에 동의하는 이유를 입체적으로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발표자가 지배양식을 분석할 때 복지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언급한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제4발표 역시 예술과 문화를 최종심급으로 간주하고 그곳에서 지나치게 큰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은 대중과 괴리된 몰락한 지식인에게 달콤한 은신처를 제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제2발표가 차이의 철학인 이유는 통일 문제를 역동적으로 바라보되, 남북 모두는 상대를 자기와 동일하게 만들려는 발상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제1발표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 또는 좌파 철학의 이름으로 진행된 진보철학이 스스로 권력화하면서 여성주의를 배제했던 점을 지적하면서 그 자폐성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차이의 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은 한철연 연구 지향점의 현주소일 것이다. 새롭게 유입되고 있는 차이의 철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가졌던 폐해를 극복하는 데 활용되는 한편, 마르크스가 본래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은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실천돼야 할 것이다.

이순웅 숭실대·철학

숭실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현재 백석대, 서울시립대, 숭실대에 출강중이다. 「그람시의 국가ㆍ시민사회론」 등의 논문과 『철학, 삶을 묻다』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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