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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논쟁은 對中國觀 변화 읽는 지표 … “외교사안 아닌 국가 정체성 문제였다”
파병 논쟁은 對中國觀 변화 읽는 지표 … “외교사안 아닌 국가 정체성 문제였다”
  • 계승범 고려대·사학
  • 승인 2009.11.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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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계승범 지음, 푸른역사, 2009)

계승범 고려대·사학
이 책은 전근대 조선왕조를 통시대적으로 살피되, 명ㆍ청의 파병 압력에 따른 조정 논의라는 주제를 통해 한중관계를, 특히 조선 엘리트의 명·청 인식의 실체를 조망하고, 그것이 한국사에 어떤 유산으로 작용했는지 거시적으로 고찰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비록 한중관계라고 달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외교관계사라기보다는 조선사회를 500년간 독점적으로 지배했던 양반엘리트 유학자들의 중화(중국) 인식에 대한 연구이며, 바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해외 파병 문제를 코드로 선택한 셈이다. 조선사회와 그 문화 전반을 보다 종합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세습 지배층이던 양반 지식인들의 의식구조를 알아야 한다. 또한 그 의식구조를 장기간에 걸쳐 형성시킨 한반도라는 공간과 500년이라는 시간적 요소를 한 데 묶어 종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때 이 시공간이 만나는 접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중관계다.

따라서 명·청의 압력에 따른 파병 여부 논쟁이야말로 단순히 한중관계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중국 인식의 실상을 장기적 맥락에서 살필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외국의 파병 압력에 의한 조정 논의 사례는 모두 15건이 넘으며, 시기적으로도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고르게 분포하므로, 이들 사례의 비교 연구를 통해 조선왕조를 이끌던 어떤 원리나 가치, 또는 시스템을 거시적으로 살피고 그 진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파병 논쟁, 지배층의 중국인식 변화와 맞물려
내용을 보면, 15세기에는 대개 사대와 국익이 서로 마찰을 빚을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결론이 난 데 비해, 16세기에는 지극한 사대가 곧 국익이라는 인식이 조정에 팽배함으로써 조선의 對明觀이 바뀌는 흐름을 보인다. 이 책에서는 그 이유로, 기존의 군신관계(가변적인 상대적 가치)에 부자관계(불변의 절대가치)가 더해진 조명관계의 특성 및 도저히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당시의 明秩序와 그에 따른 조선 엘리트들의 중국인식의 변화를 꼽는다. 아울러, 이런 분위기가 이미 강하게 조성돼 있었기에 왜란을 계기로 ‘再造之恩’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급속하게 양반사회에 번질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對明觀은 곧 엄청난 부메랑이 돼 조선의 심장을 찌른다. 왜냐하면 후금(청)이 흥기해 명(부모)을 치는 상황에서, 조선(자식)이 선택할 수 있는 외교 카드는 오직 하나, 곧 강력한 친명배금 정책뿐이기 때문이다. 조명관계가 예전처럼 군신관계였다면, 고려 때의 경우에 보이듯이, 명·청 교체의 후유증이 그렇게까지 심각할 이유는 없었다.

광해군 때 조정 논쟁의 본질과 고민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다른 말로, 논쟁의 본질은 조선에게 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었고, 당시 조선 엘리트들의 생각은 명은 이웃의 한 大國이 아니라, 유일한 문명국(중화국)이자 천자국(上國)이었다. 따라서 이 논쟁은 단순한 외교노선 문제가 아니라, 곧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 문제였다. 그러니 논쟁이 격렬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왕의 폐위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종결됐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과거 냉전 구도 하에서는 ‘한미혈맹’이 곧 대한민국의 국익과 직결됐다. 그런데 냉전 이후 현재의 정세는 미국만이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상황이 아니다. 특히 중국의 부상은 괄목할만해 이미 외교의 다변화라거나, 대한민국의 국익이라거나, 미국은 대한민국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듣는 것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바뀌었다. 이런 질문들이 가능해진 이유가 대한민국의 국익이 한미혈맹과 마찰을 빚을 수도 있는 상황이 이미 도래했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이런 상황이었기에, 삼전도의 항복이 주는 충격은 대단했다. 조선은 주자학적 가치, 곧 이념으로 유지된 사회였으므로, 왜란의 피해가 아무리 컸어도 조선의 지배체제에 결정적 위협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삼전도의 항복은 충·효에 기반을 둔 조선왕조의 지배 이념의 총체적 위기를 초래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지배층 스스로 유교의 양대 가치인 충과 효를 동시에 범했기 때문이다. 특히 삼전도 항복은 상황논리로는 변명이 안 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삼전도 항복이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변명이 가능하다면, 노비나 소작인 등 하층민들도 더 이상 양반·지주·국왕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칠 논리적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충효 이데올로기의 상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곧 조선의 유교 지배이데올로기의 붕괴를 의미했다.

역사의 공간성, 통시사와 비교사의 접점
그래서 조선후기 지배엘리트들은 그 타개책으로 사실상 외부와의 통로를 차단해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으며, 국내에서는 매우 교조적인 자기우월적 이념(尊明義理 및 朝鮮中華)을 재생산하며 지배체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청질서라고 하는 거대 틀 안의 조그만 공간에서 외친 내부용 자기의식화 작업이었을 뿐, 한반도라는 공간을 벗어난 국제무대에서는 전혀 통할 수 없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매우 역설적이게도, 청질서가 존속하는 한 조선의 ‘중화’는 존속할 수 있었으나, 근대의 파고에 밀려 청질서가 와해됐을 때 조선은 무기력하게 근대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는 조선후기를 보는 학계의 시각이 좀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학계의 흐름을 보면, 조선후기의 비교 대상은 대개 조선전기다. 이런 비교 틀을 사용할 경우, 조선후기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또한 하나의 훌륭한 해석이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간과하면 안 될 것 가운데 하나는 역사에서 시간성 못지않게 중요한 공간성이다. 조선이 세계에 속한 이상, 조선시대사 연구는 끊임없이 다른 주변(공간)과 비교돼야 한다. 그래야 세계사의 보편적 무대에 당당하게 올라 세계를 상대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조선후기가 조선전기에 비해 아무리 발전했을지라도, 만일 그 후기를 지나면서 조선의 국가경쟁력이 주변 나라(공간)들에 비해 뒤쳐지게 됐다면, 조선후기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라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근대주의의 좁은 틀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라, 역사 해석은 항상 전후문맥과 좌우공간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기본 상식에서 출발한 질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이라도, 通時史와 비교사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그에 따른 연구가 보다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

계승범 고려대·사학

필자는 워싱턴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 논저로는 「임진왜란과 누르하치」, 「In the Shadow of the Father」 등 다수가 있으며, 현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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