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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회복시키는 계기 … 친일문제 학문적 정리 시작됐다
부끄러움 회복시키는 계기 … 친일문제 학문적 정리 시작됐다
  • 김시업 성균관대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09.11.2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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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발간, 이렇게 본다

김시업 성균관대 명예교수·국문학
마침내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와해된 지 60년 만의 일이다.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연구자들의 자발적 조직에서 연구의 결실로 내놓은 자료집이다. 그동안 시비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대학교수 1만여 명이 지지 선언을 내기도 했고, 정부와 국회가 외면했을 때 3만여 국민들이 성금 7억여 원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는 지난 8일 예정된 곳에서 열지 못하고 효창원 백범 묘소로 옮겨 이루어졌다. 반대세력을 의식한 계약자의 계약 파기로 할 수 없이 가까운 묘역을 찾은 것이다.  백범 묘소가 있는 임시정부 선열묘역 앞에는 효창운동장이 있고, 묘역 좌우에는 대한노인회, 전쟁 충혼탑 등 반공 시설물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백범과 함께 심산(김창숙)을 생각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선열 묘소들을 파내겠다고 공병대가 불도저를 들이댔을 때 심산은 불도저 삽날 앞에 드러누워 그 만행을 막은 적이 있다. 죽은 백범과 살아있는 심산이 모두 이 시기 독재정권의 눈에 가시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심산에게는 일화가 많다. 해방 직후 성균관대학을 만들겠다고 앞장섰을 때 심산은 중앙청에 들어가기 싫었다. 일제의 깃발 자리에 미군의 깃발이 펄럭이고 총독부 건물에다가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군정청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억겸 교육부장을 불러내 의논했다. 이때 대학의 운명과 문제들을 좌우한 위원회는 유억겸 부장과 김성수, 김활란, 백낙준 등이었다. 하나같이 친일인사이며 연희·보성·이화전문 등 일제 시기 대학의 주인이거나 경영자들이었다.

교육계만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가 그러했다. 식민지에서 미군정, 분단정부, 6·25, 일인독재,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친일세력 상당수는 친미, 반공 애국투사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기득권을 지키고 이익과 세력을 확대 재생산해 왔다. 이와 함께 교육·연구·국민의식 전 부문에서 민족적 가치와 역사의식이 왜곡 전도돼 왔다. 우리 자신이 이러한 형편 속에서 일본에게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일들이 어찌 힘을 실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민주주의와 생활 경제의 성장으로 국민의식이 훨씬 성숙했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 국민을 교묘히 속이고 주눅 들게 하는 지식인의 지배시대는 가고 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각 분야 전문가들의 학문적 연구성과와 시민적 자각과 역량이 어우러져 오늘 이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게 됐다. 그러니 이 책은 친일문제에 대한 결론이 아니라 역사적 청산과 학문적 정리의 시작이다.

사전의 편찬 취지가 ‘고백적 자기성찰’에 있고, 편찬 목적이 “개인에게 책임과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리와 역사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역사의 교훈을 남기기 위한 데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우선 학문적 작업으로 읽어야겠다. 흥미 위주나 감정 중심의 단정과 판단의 자료로 볼 것이 아니라 사실의 규명과 수정 보완을 계속하고 또한 반론적 관점의 토론이 열려 있어야 한다. 식민지 근대의 연구와 관심이 심화돼야 한다. 다음은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고양하는 방향으로 읽어야겠다. 제국주의, 파시즘, 침략 전쟁이 민족과 인류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그 심층적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의 공동체 의식을 확립하는 방향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자료는 부끄러움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부끄러움이 마비된 인간과 집단은 죄악이 될 가능성이 많다. 지조와 도덕성을 외면하는 기능적 지식이 아니라 양심을 가진 역사적 지성이 돼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이 앞서야 이해와 포용도 따를 수 있다.

이 책자가 결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진실로 바로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사회와 언론은 감정적 소모적 논란을 자제하고 우리가 성숙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민족적 대의와 인류 평화적 사명을 생각하면서 역사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새기고 가르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시업 성균관대 명예교수·국문학

성균관대에서 박사를 했다. 한국고전문학회 회장과 민족문학사학회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산사상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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