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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房, private space의 전성시대
방, 房, private space의 전성시대
  • 김정아 기자
  • 승인 2000.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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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도 '방'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거리에 모이는 대신, 거리에 지어놓은 방으로 들어간다.
청년들은 PC게임방, 편의방을, 직장인은 휴게방, 캡슐방을, 아줌마는 찜질방, 황토방을 찾는다. 91년 4월 부산에 상륙한 노래방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거리의 '방'들은 소위 퇴폐의 색깔을 띠었다. 92년엔 비디오방이, 96년엔 일본의 '테라쿠라' 즉 '텔레폰 클럽'을 본뜬 전화방이 영업을 개시했다. 화상전화방의 등장과 함께 '퇴폐방'의 멀티미디어화도 진행됐다. 거리에 세워진 육면체의 밀실들은 '방'이라는 이름을 빌어 가정이라는 이상적 공간의 아우라를 판매한다.

공공영역과 분리된 사적 영역, 통속적 욕망의 내밀한 거처

거리의 방들과 가정의 방은 '방'이라는 이름 말고도 비슷한 점이 있다. 방은 공공 영역과 분리되는 사적 영역이다. 방안에선 원한다면 방밖을 볼 수 있지만, 방밖에선 방안을 보기가 어렵다. 부르주아의 방이 주관성의 상징인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거리의 방들은 가정의 방을 패러디한다. 거리의 방에는 아예 창문이 없다. 최소한, 창유리가 코팅되어 있거나 두꺼운 커튼이 달려있다.

그러나, 거리의 방에 들어가는 사람들 중 아무도 외부로부터의 완전한 단절, 고독을 원하지 않는다(예외라면, 캡슐방에서 오수를 청하는 직장인 정도). 방에선, 거리에서 좌절된 욕망을 성취하고 거리에 의해 단절된 타인과 연결된다. "전화가 울릴 때 단절된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기분이다" 전화방 이용자는 말한다. 물론 비전향 장기수의 독방과 비슷한 크기의 화상전화방에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TV모니터다. 그 모니터에 뜨는 동영상은 때로 여고생의 누드다.

만프레도 타푸리에 따르면, "펜트하우스와 빠리 사이의 거리는 잠망경에 의해서 확보된다. 파편과 전체가 통합되기 위해선 반드시 기술의 매개가 필요하다". '나'라는 고독한 파편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만나기 위해선 '방'이라는 파편적 공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은 거리로 나있는 창문 대신 모니터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은유를 빌자면, 방은 "세계라는 극장의 박스석"이다. 19세기 극장의 박스석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재설정함으로써 위험한 공공영역 내부에 특권자들을 위한 사적 공간을 제공했다.

그러나 지금 서울 거리의 방들은 19세기 서양 방들이 갖고 있던 편안함과 안전함을 잃었다. 안과 밖의 서열은 전복됐다. 방안에서 바라보는 매개된 세계는 너무나 왜곡되어 현실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에, 방밖의 세계는 언제든지 방안의 내밀함을 감시하고 폭로할 수 있다.

비디오방이 러브호텔의 기능을 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관계당국은 청소년이 그 방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고, 포르노 제작자들은 그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 그 방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를 바라볼 가능성을 끊임없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모니터는 내가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아니라, 밖에서 나를 감시하고 위협하는 창문이다. "몰래카메라로 인한 피해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다. 여관, 모텔, 사우나 등 은밀한 장소에 출입할 때는 항상 주의하라" 사이버성폭력센터 연구원의 충고다. 작년 7월부터 시행된 '청소년보호법'에 따르면, 19세 미만 청소년들은 비디오방을 출입할 수 없다. 그러나, 올해 서울시가 국회에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학교 경계선에서 직선거리 200m 이내에 PC방 1091곳, 오락실 485곳, 노래방 109곳, 비디오방 101곳, 러브호텔 93곳, 룸살롱 9곳 등 소위 청소년 유해업소가 1786곳이다.

19세기적 밀실에서 폐쇄공포와 허위의식을 느꼈던 시인 앙드레 브레통은 안과 밖이 없는 투명한 유리방에 살고 싶어했다.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은 그런 방들을 실제로 지었다. 루돌프 쉰들러는 새로운 건축이 절정에 달하면 실내와 실외의 구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21세기 서울의 도시에서 우리는 아직 밀실의 환상 속에 살고 있다. 더구나 그 밀실은 '자기만의 방'에서 근대적 자아를 키워보지 못한 우리에겐 더욱 파괴적이다. 우리의 밀실은 자기의 독립성과 개별성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의 거대한 억압에 맞서는 전장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조작된 통속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폭력에 편승하는 투항의 공간일 뿐이다. 지난 7월 5일 서울 D대 K교수는 홋카이도의 노래방에서 일본인 여제자를 '성추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월 17일 충북지방경찰청 기동수사대는 여고생을 고용하여 '윤락행위'를 시킨 화상전화방을 단속했다.

창밖을 '방관'하며 방밖 세계로부터 자기를 '방어'해야 하고 방안에선 수시로 '방종'해야 하는 우리가 브레통의 급진적 소망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안과 밖이 없는 건물에 사는 것만으로 부르주아적 주관성을 극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적인 가정과 달리 가슴속에 있는 내밀성은 이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만져질 수 있는 어떠한 장소도 갖지 않으며, 내밀성이 저항하고 항변하는 대상인 사회 역시 공적 공간과 같은 식으로 분명하게 국지화될 수 없다"고 한나 아렌트도 말했다.

그러나, 거리에 세워진 방들은 분명 창 없는 모나드를 형상화하는 '은유로서의 건축'이다. '전망 좋은 방'에서 거리를 내다보고자 하는 소망, 지금 방안에 있는 이들을 거리에서 만나고자 하는 소망을 간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정아 기자 anonio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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