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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수족관과 꽃나무에 관한 단상
[만파식적] 수족관과 꽃나무에 관한 단상
  • 교수신문
  • 승인 2002.04.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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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06 10:36:11
김주숙/한신대·사회복지학

아침저녁으로 지나치는 시장통 골목길의 한 수족관이 나에게 측은지심을 일으킨다. 식당 밖으로 돌출된 어항 같은 수족관 안에 장어들이 한 가득 들어 있어 때로는 잠자듯이 누워있고 때로는 물결을 일으키며 요동을 친다. 쌍둥이들처럼 크기도 비슷한 저 녀석들이 어디에서 태어나서 저 좁은 곳에 갇히게 된 것일까, 저들은 수족관 안에서 무엇을 먹으며 손님들 식탁에 오르기까지 며칠간의 잔명을 이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마냥 딱한 느낌이 든다.
넓은 물속에서 살다가 이제 저 좁은 공간 안에 엉켜 있으니 숨막히지는 않을 것인가, 혹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 의해 저렇게 키워졌던 것은 아닐까. 저중에 아픈 녀석은 혹 없을까, 저 중의 한 녀석이 시원치 않아 보여 예컨대 마이신 같은 약이 수족관 물에 풀어 넣어지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읽은 기사도 생각난다. 수입한 횟감 생선들을 수족관 차안에 담아 서울로 수송하는 동안 녀석들이 몸부림치고 서로 부딪쳐 상처가 나지 않도록 기절시켜서 운반했다는 것이다. 생선들을 기절시키는 것이 약품일까, 아니면 몽둥이일까, 인간들이 참 몹쓸 짓을 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음식물쓰레기를 모아 보내는 돼지 농장을 견학한 적이 있다. 그 돼지 농장에서도 수족관 장어들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딱한 사정을 보았다. 모범농민이기도 한 농장주인이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돼지우리는 농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돼지공장’ 이었다. 돼지들은 기계적으로 먹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도록 공간배치 당해 오로지 살만 찌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옛날 시골에서 보던 꿀꿀이 돼지우리는 차라리 사치였다. 돼지들은 생명이 아니고 이미 꿀꿀 소리도 잊어버린 고기 덩어리 제품이었다. 그날 농장주인은 견학 온 우리들을 위해 농장에서 생산한 생고기를 푸짐하게 내놓았으나 나는 한 점도 먹지 못했다. 그렇게 ‘비 돼지적’으로 길러지는 돼지들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 일었고, 지금 막 상견례 한 돼지들의 슬픈 눈망울이 보이는 듯 해서였다. 그날 이후 한동안 나는 정육점을 피해 다녔다. 어쩌면 제 혈육 살점이 섞였을지 모르는 인간들의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그 인간들의 입맛을 위해 특정 부위의 살이 찌도록 강요받는 돼지들. 하늘 한번 보지 못하고 새소리도 듣지 못한 채 태어나서부터 걸음마조차 못하도록 고안된 컴컴한 우리 안을 꽉 채웠던 돼지 친구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규정하고 동·식물을 지배할 수 있다는 성서적 해석을 인정한다 해도 비자연적인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임에 틀림없다. 식물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의 오만성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집집마다 거실을 장식하는 서양난 화분에 흙은 없다. 산비탈 바위 끝에서 고고한 자태를 누리던 토종 난도 붙잡혀와 가짜 토양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들의 삶은 한시적으로 예정되어 있지만, 지금 ‘살아있음’에 생명의 환희를 느낄 것인가. 억지로 꼬부려 철사로 동여 맨 분재나무들은 인간의 미적 감각을 위해 계속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 화분에 놓인 꽃나무들은 인간들의 기호에 따라 인공적으로 조작된 호화물품이 되고 있다. 그들에겐 자연도 생명력도 이미 허구일 뿐이다.
환경보호는 오늘날 대 명제가 됐다. 사람들은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를 원한다. 상생도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들끼리의 상생은 가치가 없고 환경보호는 불가능하다. ‘자연윤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동식물에게도 자연권이 있고, 가축도 동물처럼 살고 싶다. 식물은 비닐하우스와 가짜 흙이 싫다. 동식물의 자연성 회복은 인간환경의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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