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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서평] 국민국가를 비판하는 『국민이라는 괴물』·『표상 공간의 근대』
[비교서평] 국민국가를 비판하는 『국민이라는 괴물』·『표상 공간의 근대』
  • 최태원 수유+너머 연구원
  • 승인 2002.04.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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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03 16:42:06

●비교 서평 : 국민국가를 비판하는 『국민이라는 괴물』 (니시카와 나가오 저, 윤대석 옮김)· 『표상 공간의 근대』(李孝德 저, 박성관 옮김, 소명출판 刊)

최태원 / 수유+너머 연구원·국문학

국가의 개조나 변화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국가의 존재를 상대화하지 않고서도 근대의 외부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국민국가 비판은 90년대이래 일본의 근대성 논의를 꿰뚫는 핵심어가 된다. 시간을 거슬러 메이지 시대로 향하더라도, 그들의 비판적 시선은 늘 현재에 밀착돼 있다. 따라서 역사적 재구성은 과거의 실증적 해명을 겨냥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현재를 상대화하는 것, 이것이 비판의 진정한 취지이다.

‘표상공간의 근대’의 저자 이효덕은 재일 한국인 2세의 젊은 연구자이다. 그의 석사논문이기도 한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영역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회화에서 시작된 논의는 소설과 사진을 거쳐 미디어, 서적, 학교, 박람회, 철도 등의 기술적 장치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는다. 전쟁화, 만화경, 속기술, 사진, 박람회, 공판기록 그리고 소설의 삽화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재구성하는 메이지 시대의 풍경은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개별 사실들을 화려하게 나열하는 데 있지 않다. 저자가 개별 사실들을 가로지르며 시종일관 묻는 것은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표상체계(representational system)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이다.

이 변화란 결국 인식론적 배치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며 그 가능성의 조건은 균질공간의 탄생이다. 이 균질공간은 선원근법의 회화 공간과 뉴턴의 절대공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때 초월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경험 속으로 용해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이중적이다. 신성하고 절대적인 시선은 표현 자체의 영역으로 귀속된다. 동시에 모든 이질적이고 개별적인 시선은 상대화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균질화이다. 원근법의 소실점이나 화자의 중립화된 시점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때 비로소 익명의 풍경이 회화와 소설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표현 코드(표상체계)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것은 신문, 출판, 교육, 철도 등의 미디어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국가를 ‘상상의 공동체’로 명명했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천황제가 근대적 미디어를 통해 개개인에게 분배되는 양상을 초월성의 세속화, 개별화로 파악하는 대목이 그렇다. 저자가 보기에 천황제는 일종의 소실점과 같은 존재이다. 천황제가 근대적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일본’이라는 균질공간이 생겨난다. 그것이 표상 시스템의 변동에 의해 생겨난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처럼 국가화된 균질공간 위에서 익명의 풍경은 “국민적 풍경”으로 재편성된다. 문제는 이 공간에서 잡종성이 억압당하고 타자가 배제된다는 것이다. 균질적이고 평등한 국민으로서의 ‘일본인’ 역시 그렇게 생겨난 주체이다.
‘국민이라는 괴물’에서 국민국가 비판은 좀더 직설적이다. 국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특정한 역사적 국면의 산물이다. 압도적인 현실임에는 틀림없지만 숙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연적이고 인공적인 것에 가깝다. 국민은 신체의 자연적인 리듬이 국가화된 결과이다. 이것이 저자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가 국민을 정의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에세이, 서평 등 모두 14편의 짧은 글로 구성돼 있다. 저자는 1934년생으로 일본 학계에서 근대 국가의 형성과 다문화 사회 연구를 이끌고 있는 노장학자다. 글은 쉽게 읽히고 논지 또한 분명하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던 ‘표상공간의 근대’까지 포함하여, 최근 일본에서 문학, 언어학, 문화인류학, 정치학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국민국가 비판의 기본틀을 내장하고 있는 까닭이다. 저자 자신이 국민화의 회로에 귀속되기를 거부하고 비국민임을 자처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실존적인 무게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국민국가의 상호모방성 내지 국가 장치의 모듈성 테제는 저자가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틀이다. 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모든 장치는 얼마든지 “떼어 내고 집어넣을 수 있는” 이식 가능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렇게 복제된 250여 개의 국민국가가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다. 국민의 형성 역시 동일한 회로 속에서 반복된다. 공간과 시간, 습속과 신체, 이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국민이 주조된다. 저자는 반체제운동조차 그것이 국가권력을 목표로 하는 한 국민화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국민이라는 괴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저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국민국가 이후’를 말한다. 하나는 탈국민화, 비국민화이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기초하여 저자는 이제 국민국가의 운명이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단언한다. 물론 국가 시스템이 한순간에 붕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으로 군림할 수 없을 때 국가는 자기 존재 기반을 상실한다. 가령 “국민이 조국을 위해 죽기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국민국가는 성립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국민이라는 주술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또 다른 제안은 ‘異文化 교류’를 통해 ‘국민국가 이후’의 사회와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문화의 최초 형태는 교류 그 자체였다. 문화는 본래부터 유동성과 잡종성, 복수성을 특징으로 한다. 국어나 국민문학은 국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허구일 따름이다. 오히려 밝혀져야 할 것은 국어의 다언어성이라든가 국민문학의 잡종성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교류는 자기와 타자의 변용을 초래할 상호 변용의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해야만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최근 일본의 근대성 논의는 다문화주의나 탈국민국가론을 연구 방향의 큰 가닥으로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이 식민지 운영의 경험과 결합되면서 연구의 소재와 폭은 대만과 만주, 한국으로 크게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만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요구받을 것이다. 자신의 현재를 상대화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근대성 비판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민족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더욱 활성화돼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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