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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초대석]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신문로초대석]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교수신문
  • 승인 200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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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대표적인 논객을 찾아 그들의 삶의 논리를 들어보기 위해 신설된 '신문로초대석'의 첫 번째 초대손님은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영남대 교수(영문학)다.
그가 지난 91년 창간한 '녹색평론'은 생태위기를 가장 근원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환경잡지로, 최근 한국 지식인의 사상적 계보를 그려낸바 있는 일본의 윤건차 교수(가나가와대)는 그를 '근본생태주의자'로 분류한 바 있다. 대구시 범어동에 있는 녹색평론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오랫동안 간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탓인지 마르고 수척해 보였지만, 대단히 고집스럽고 단단해 보였다. 두평 남짓한 그의 사무실에는 김 교수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씨와 물레짓는 간디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김교수는 지난해 20여년만에 펴낸 평론집 '시적인간과 생태적 인간'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대담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영남대 교수 - 김재환 편집차장

"파멸을 향한 문명의 질주…가난한 삶이 우리를 구원한다


- 7, 80년대에 선생님은 주로 문학비평가나 영문학자로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녹색평론' 발행인으로서 더 잘 알려진 듯 합니다. '녹색평론'에 대한 반응은 어떻습니다. 요즘같은 불황에 시장에서의 반응도 어떤지 궁금하군요.

"'녹색평론'의 정기독자는 5천명 가량 되지만, 실제로 돈을 내는 독자는 2천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구독료를 내지 않는 독자에게도 6개월 정도는 그냥 보내주지만, 그래도 구독료를 내지 않는 사람이 많아 어렵습니다. 이 책이 독서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같은 단행본을 낸 것도 '녹색평론'의 독자를 믿고 낸 것이었는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군요. 지역 곳곳에 생겨난 '녹색평론 독자모임'은 실제로 저나 잡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지요. 녹색평론 독자모임이라고 해서 대단한 울타리를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지만 이 모임 때문에 잡지운영이 좋아진 것은 없습니다."

- '녹색평론'은 특이하게도 격월간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펴내신 '간디의 물레'(녹색평론사 펴냄)를 보니, 영국의 생태마을 하틀랜드에서 인도인 사티쉬 쿠마르라는 인물이 펴내는 '소생(Resurgence)'이라는 잡지가 소개되고 있더군요. '녹색평론'의 모델이 되었던 것은 이 잡지인가요?

"무슨 모델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지적인 잡지가 대개 '계간지'인데, 이 정도의 정기성으로는 너무 굼뜨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미국학술지의 발행주기에서 빌려온 계간지 모델은 문제되는 사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거나 중요한 시대적 진단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격월간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겁니다."

- 매체를 통해 생태적 가치를 전파한다는 것은 일단 '저널리즘'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널리즘을 통한 문제제기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현재 상황에서 기대할수 있는 것은 작가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기자입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기자들이 너무 공부를 안하고 단기적으로만 사태를 파악하는 즉각적인 만족(instant gratification)에 그치고 있다는 겁니다. 과학기술시대에 아마추어적인 실력을 가지고 생명공학 등의 과학기술이 가져올 문제를 비판해서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과학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는데, 정작 아무런 지식도 없고 꾸준한 공부도 없으니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고 늘 구태의연한 목소리만 반복하고 있는 거지요. 한국처럼 역동적인 사회에서는 저널을 통한 공론화가 쉽습니다. 미국처럼 넓은 곳이 아니니까요."

- 교수와 같은 지식인들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시는 겁니까?

"대학교수들은 논문에 대한 억압, 돈생기는 논문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이런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인문학 위기 운운하는데,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쓸모 있는 공부라도 하면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죠. 인문학자들은 늘 프랑스 사람들 이름 외우고 삼류주석이나 달고 있죠. 프랑스가 문화국가라고 하지만 남태평양 산호초 뭉개가면서 핵실험하는 나라고, 그거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는 지식인을 가진 나라가 어떻게 문화국가로 불릴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를 말할 자격도 없지요. 알제리를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걸 생각해 보십시오. 프랑스 지식인들을 비행기표 끊어주고 호텔비 물어가며 대접할 게 아니라, 산호초 망치고 핵실험하고 있는 그네들의 문제에 대해 먼저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랑스 지식인에 대한 숭배를 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공부를 정말 안하는 사람들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좌파지식인들도 노동운동 얘기만 하고 있어요."

-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간디, 루이스 멈포드, 노자, 하이데거, 아메리카 인디언, 무위당 장일순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이 자주 등장합니다.

"간디는 고등학교 때부터 읽기도 했고, 젊어서 제게 큰 영향을 준 함석헌 선생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이 보게 됩니다. 루이스 멈포드는 생태적인 관심과 무관하게 계속해서 공부를 해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무엇보다도 문장이 주는 힘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함선생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가 요즘 쓰고 있는 글이 과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반성하게 됩니다.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시대 탓만 할게 아니지요."

- 초기 평론집인 '시와 역사적 상상력'에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글이 두편이나 실려있습니다. 최근 내신 책에서도 가끔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블레이크가 합리주의에 기초한 산업문명에 대한 비판자였다고 해석하고 계신데요. 선생님이 생태적 가치에 주목하게 된 것은 블레이크의 영향이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블레이크는 기계를 대단히 싫어합니다. 그런 체질이 저와 맞기도 하고, 따지고 보면 세계문학사에게 블레이크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문명에 대한 타협이 없는 눈이 맑은 시인이지요. 블레이크의 기독교 해석은 육체와 몸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주는데, 당시의 관념적인 당시의 주류적 해석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요즘 문화이론에서 말하는 몸담론이나 욕망에 대한 강조가 이미 블레이크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는 폭력만으로 다스려지는 게 아니다"라는 진술은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선구적 제시라고 볼수 있죠. 저는 그를 좋아해서 석사논문을 블레이크로 쓰기도 했습니다."
- 최근 간행된 '말'지에서 의료문제에 대해 대단히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고 계신데요. '녹색평론'에 쓰신 여러 글에서도 서양의학이 전통사회의 사람들이 가졌던 자기 몸, 나아가 삶에 대한 기술을 퇴행시켰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의료기술이 아니라, 문명 전체입니다. 사람의 생활을 편리하고 건강하게 해준다는 현대의학이 사람에게서 자기 몸을 다스릴 줄 아는 자율적인 능력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현대의학이 가진 성격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술주의와 상품성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기술과 상품 아닌 것이 없지만, 그 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서양의학입니다. 우리사회는 인식이 참 더딘 것 같습니다. 편리하고 아픈 거 치료해주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하지요.

서양의학을 우리가 오랫동안 하나하나 검토해서 수입한 것도 아니고, 미국에서 들여온 거니까 좋은 거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왔지요. 의사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인'들입니다. 미국의 '주인'들은 자기들이 교과서를 썼으니까 교과서의 숨어있는 약점을 알지만, 식민지에서 배우는 하인들은 문맥속에 숨어있는 약점을 알 수 없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학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당대비평' 겨울호를 보면, 김우창 선생(고려대 영문학)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한국에 왔을 때 대담을 하게 되었는데, 부르디외가 뭘 물어볼지 미리 질문서를 제출하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김우창 선생은 세계 어디 내놔도 결코 손색이 없는 학자이고 지식인인데,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수모를 당하는 겁니다.
제가 그동안 문제제기 했던 문제중의 하나라 '수돗물 불소화 반대운동'인데요. 수돗물 불소화는 우리가 먹는 물에 화학물질을 넣는다는 그 기본발상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게다가 불소는 운반박스에 해골이 그려진 유독물질입니다. 치과의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몸에 좋은 물질을 수돗물에 넣는다면, 왜 내과의사들은 몸에 좋은 비타민을 넣자고 주장하지 않을까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수돗물을 먹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의사도 묻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적용한다는 점에서 '강제의료행위'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강제로 집행할 권리는 없습니다. 삶의 가치를 건강이 아닌 다른 것에 두는 사람은 불소화를 반대할 권리도 있는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집행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입니다."

- '포에티카'에 실렸던 김우창 선생과의 대담이나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에 실린 김우창 선생의 발문을 보면 두 분 사이가 참 각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승이기도 하고 영향을 받은 것도 많습니다. 김우창 선생은 한국의 공식적인 정규교육을 통해서는 나올 수 없는 지식인입니다. 해방기나 6·25등의 격동기의 교육은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는데, 그런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속에서 김우창 선생같은 지식인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평지돌출이다. 글이나 강의를 통해서 보는 선생은 대단히 시야가 크고 종합적이었죠. 몇 년 전에 고려대에서 이 분을 어학연구소 소장으로 임명을 했는데,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가 사람을 아낄 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학자를 공부를 하도록 놔두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대학의 풍토입니다."

- 글을 통해서 본 선생님의 입장은 산업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소규모 농업공동체를 상정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미국의 애미쉬 교도들의 마을이나 인도의 마을 말이지요.

"결국 고대에서 문제가 비롯된 것 같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추방이 다른 뜻이 아니라, 결국 국가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비인간적인 환경을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루이스 멈포드도 말년에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 역시도 30년대 까지는 기술문명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지만, 그 이후에는 원시문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빌리지컬처(villege culture)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거 같습니다."

- 결국 그 논리는 자연스럽게 아나키즘으로 귀결되는데...

"멈포드를 아나키스트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간디도 마찬가지고요. 아나키즘은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적 모델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주는 논리지요."

- '녹색평론'의 지면에서 본 선생님은 산업문명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함께 생태적 삶을 위해서 개종에 버금가는 윤리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입장을 근본생태주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일상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무기력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도대체 산업문명을 제외하고 뭘 할 수 있을 지요. 대안을 구성한다기 보다, 비판이 가진 힘과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 건지요.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산업문명의 폐해를 극복한 유토피아가 만들어질수 있다고 믿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생태파괴의 현실에 대해서, 산업문명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을 해야한다는 사실이지요. 뭘 해야하는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고 살아가느냐도 중요합니다. 비판만 하고, 뭘 하자는 거냐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저 역시도 그렇게 따지면 교수고 책장사에 불과하지 아무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나 혼자라도 산업문명의 흐름과 다른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국방성 펜타곤은 사실 조직화된 합법적 테러조직인데, 거기에 있는 젊은이들 몇 명이 펜타곤에 서려있는 사악한 기운을 조금이라도 맑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어느 방에 모여 명상도 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일을 한다고 하더군요. 몽상가들이고 헛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노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봅니다. 펜타곤같은 데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라도 나올수 있었다는 게 희망적이라고 봅니다. 지금 당장 파라다이스가 만들어질 수 있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는 게 아닙니다. 이런 아주 작은 노력이 바로 희망의 실마리입니다. 희망의 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정치철학자는 우리시대의 문제는 10세기가 지나야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더군요. 인간의 삶이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데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 김우창 선생은 선생님의 논리를 '자연의 정치'라고 말씀하고 계신데요. 집필이나 현실참여, 잡지발간 등의 작업도 넓은 의미의 환경을 매개로한 정치행위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경문제도 역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나를 '근본주의자'라고 하지만, 근본주의가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런 차원의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니까 하는 거죠. 산업문명의 구조속에서는 우리의 삶이 축소되지 않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가난해져야 합니다. 자동차회사가 무너지면, 자전거 회사로 전환하는 방식의 경제체제의 축소가 필요한 거죠. 이 거대 산업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환경세 신설, 환경규제만을 말하는 환경운동은 체제옹호적인 운동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치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죠. 윤리의식을 강화하고, 도덕적 결단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식의 입장과는 애시당초 인연이 멉니다."

- 선생님은 삶 속에 내재한 초월의 계기들, 우주적 신비의 경이같은 것을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영혼이나 영성이니, 초월이니 하는 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문학공부를 한 사람이니까 그런 말을 하는거죠. 같은 환경운동을 하더라도 자연과학자나 사회과학자와는 인문학자는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겠어요? 생명공학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기분이 참 좋질 않습니다. 사람이 복잡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점을 떠난다면, 이미 생명도 무엇도 아닙니다. 인간에 대해 과학적으로 모두 알고 나면 세상은 참 재미없을 겁니다. 문학도 예술도 없는 것이죠. 대학생 시절에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때의 충격을 나 나름대로 풀어내기 위한 일입니다. 헉슬리는 그 책을 쓰고 나서 인간사회에 대한 절망 때문인지 몰라도 신비주의에 전념하게 됩니다. 미국의 선마이크로시스템사의 공동창립자이자 대표적인 컴퓨터 과학기술자인 빌조이는 과학기술에 가져올 재앙에 대해서 묵시론적인 경고를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지요.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희랍의 최고 목적은 지식이 아닌 행복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과학자들은 지식을 위한 지식, 아니 그로 인해 얻게될 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생명공학 연구를 한다니요. 인간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수 있지만, 병에 걸려 고통을 받기도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의 본질일 겁니다. 물론, 병과 싸우고 극복하려는 노력도 인간적인 것이지만 말이죠. 인문학자들이 바로 이런 문제들과 싸워야 합니다."

- 선생님의 문학평론은 주로 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꾸준히 강조를 해오셨는데요.

"시에 대한 욕구는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강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제는 요즘 좋은 시가 안나온다는데 있습니다. 요즘 고은, 신경림, 김용택 시가 뭐가 좋습니까? 김용택은 초기의 소박한 시가 좋았지만, 지금은 상표가 돼버린 거 같아요. 시를 썼다고 시인인 것이 아니라, 시를 안써도 시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시인이라고 봅니다. 영문학을 해서 그런지 저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 사회적 효용에 대한 믿음이 강합니다. 글도 수식어 없이 직서적으로 쓰는 편이죠. '촌놈'이라서 그런지 소박한 것을 좋아합니다. 황지우나 장정일 같은 재기발랄한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로렌스가 말한 "삶을 떠난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말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소박한 면만 있어서는 안되지만, 큰 틀에서는 소박한 것이 좋은 문학이죠. 재주부리는 문학은 문학이 될 수는 있지만, 큰 문학은 될 수 없을 겁니다."

● 김종철을 말한다

현실속에 선 확신의 인간


김종철 교수가 1970년대에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을 때 김교수는 드물게 보는 꼼꼼한 논리적인 이론가였다. 주어진 대상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검토함으로써 어떠한 결론에 이르려는 그의 논리의 끈기는 당대에 달리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녹색평론'이 대표하고 있는 현실은 물론 오늘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어야할 현실임에 틀림이 없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 현실에 형태를 주고 초점을 제공한 것은 '녹색평론'이다. 그리하여 이 중요한 현실은 김종철 교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녹색평론'이 표방하는 목표의 성질상 그것이 어떠한 현실적 힘-정치적 힘, 대중적 영향력 또는 지도자 -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집단의 형성을 약속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녹색평론'의 창립은 현실 창조의 행위이면서도, 완전한 신념의 행위로 생각된다. '녹색평론' 이후의 김종철 교수를 말한다면, 그는 초기 평론의 이론가라기 보다는 현실속에 확실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확신의 인간이다.
김종철 교수의자연에 대한 깨우침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깨우침으로서 처음부터 준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람의 밖에 있는 자연은 안에 있는 자연과 일치한다. 안으로 가는 길은 밖으로 가는 길이고, 밖으로 가는 길은 안으로 가는 길이다. 위에서 김종철 교수가 이론가에서 시작하여 확신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 둘은 그에게서 하나이다. 이것이 그의 독특함이다.
- 김우창, '시적 인간과 자연의 정치'에서

● 녹색평론을 창간한 이유

불타는 보리밭이 준 절망


91년 늦가을에 잡지의 창간호가 나왔는데, 그해에 유명한 낙동강 페놀방류사건이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런 문제에 사람들이 둔해져 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이것은 굉장한 환경사고로 인식되었다. (...) 페놀사건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실은 그것보다도 내게는 더욱 심각한 사건이 그해 초여름에 이 나라의 농촌 여러곳에서 빈발하였다. 겨우내 자라서 수확을 앞둔 보리를 거두지 않고 농민들 자신이 밭째로 불태워버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 수십년동안 이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끊임없이 망가뜨리면서 이룩해온 경제개발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는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가난'이라면 곧 보릿고개를 뜻하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다 자란 보리밭을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것이 좀더 합리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건전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이런 미친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 절망은 아마 우리의 삶이 철저히 불경에 기초해 있음을 똑똑히 목도한데서 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보리를 태운 농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산업문화 전체의 본질적 문제이다. 인간성의 소멸을 대가로 하는 경제성장이니 '진보'니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해 초여름 이후 나는 내내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했다. -'간디의 물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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