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2:10 (토)
[우리시대의 고전] <26>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우리시대의 고전] <26>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 양정무 / 한국예술종합학교
  • 승인 2002.04.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4-03 16:05:59

양정무 / 한국예술종합학교·미술이론

곰브리치(E. H. Gombrich)
(1907~2001)
곰브리치는 비엔나의 중산층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말러, 쉔베르그와 교류하는 피아니스트였다. 비엔나 대학교에서 이탈리아 매너리즘 작가 율리오 로마노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나치의 위협이 드세지자 1936년 영국에 망명했다. 바르부르그 연구소 연구원과 런던대 강사로 일하던 1950년 ‘서양미술사’를 발표, 일약 미술사학계의 유명인사로 급부상한다. 이후 옥스포드대와 캠브리지대학의 석좌교수직 등을 역임하다가, 작년 11월 3일 향년 92세로 타계했다. 국내에서는 도리어 ‘그가 아직도 살아 있었느냐’가 뉴스거리였지만, 그를 기억하는 후학들에게는 어려운 시간이었다. 곰브리치는 대학자의 위엄보다는 겸손함과 자상함을 갖춘 선비였기 때문이다. 옥스포드 대학의 불교학자 리차드 곰브리치가 그의 아들이다.

‘히스토리’ 이전에 ‘스토리’

‘여유롭게 쓴 서정적인 각주가 냉혹한 본문보다 더 재미있다.’ 이 말은 곰브리치의 방대한 학문적 생애 속에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한국어판 1972)를 위치지우는데 적절한 표현이 될 듯 싶다.
‘서양미술사’는 본격적인 학술 저작이 아니라 청소년을 위한 미술사 입문서로 큰 욕심없이 기획·집필됐는데, 출판 후에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자 저자 자신도 놀랐다고 한다. 청소년용 책이 전세계에 고급 독자를 확보하면서 출판된지 50년이 지난 후에도 대학 강단에서도 주저없이 사용되는 것은 개설서의 평이함 속에 심리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웅장한 곰브리치 미술사의 정수가 베어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물론 ‘서양미술사’는 단지 곰브리치의 본격적인 학술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20세기 후반의 난해하고 복잡한 미술사 서적과도 잘짜여진 본문과 주석의 관계처럼 깊게 연결된다. 문자 그대로 평이함과 깊이, 거기에 모더니티까지 골고루 갖춘 현대의 모범적인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술같은 매력은 책을 펼치자마자 시작된다. “정말이지 미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했다면 단지 그걸 만든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지요(THERE REALLY is no such thing as Art. There are only artists).”
‘미술 속에 예술은 없다’는 곰브리치의 첫 말은 ─ 이 책이 입문서라는 점을 고려할 때 ─ 거의 독자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상파괴적 발언은 미술 감상에 으례 뒤따르는 편견, 허세, 과장같은 거품을 걷어내기 위한 필요한 조치였다. 서문 이후 총 28개의 장을 통해 동서고금의 4백여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탄생 배경을 소개한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해를 고증된 자료와 함께 진지하게 구해 나가는 그의 자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편견없이 전세계의 다양한 미술에 깊이있는 고급 지식을 전달하는 이 책은 발표 이후 전세계의 미술계 인사에게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 국립미술관 관장 닐 맥그리거 박사나 국내의 여러 작가들이 젊은 시절 ‘서양미술사’를 읽은 후 미술에 대해 견해를 넓히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회상하는데, 나는 이들의 말이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50년전에 쓰여진 ‘서양미술사’에 약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나 탈구조주의같은 포스트모던 미술사의 도래에 의해 젊은 연구자들은 이 책을 남성중심적-서양중심적 사관을 지닌 것으로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비판은 자연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본격적 저작 소개 아쉬워

‘서양미술사’를 곰브리치가 학문적 노정에서 벗어난 각주같은 글이라 했다. 물론 각주는 각주일 뿐 그의 미술사의 정수는 그의 본격적인 미술사 저작에서 찾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 소개가 미흡한 점이 아쉽다.
심리학과 미술을 결합한 이론서 ‘예술과 환영’ 외에도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4권의 책을 포함하여 총 20여권의 방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있다. 자서전적인 인터뷰를 담은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1997)도 최근 번역 출간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