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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 근거한 열광 우려 … 언어 다양성 관점에서 이해해야”
“오해에 근거한 열광 우려 … 언어 다양성 관점에서 이해해야”
  • 김주원 / 훈민정음학회장
  • 승인 2009.10.12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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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에 생각하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과의 한글 나눔

 올해 7월에 인도네시아의 바우바우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한글을 통한 찌아찌아어 교육 소식은 한동안 보도 매체를 통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의 여러 실패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서 언론 기관과 접촉을 피하면서 일을 진행하다가 현지에서 교육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알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너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게다가 해외의 언론들도 국내 언론에 뒤지지 않고 신속하고도 진지하게 취재를 했다.

국내의 반응과는 달리 해외 언론이나 관심 있는 이들의 반응은 다소 의외라고 보는 것 같다. 그 주된 이유는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글자 없는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는 알파벳 즉 로마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글이 이 역할을 감당하겠다고 나섰으니 그들로서는 뜻밖의 사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한글 나눔은 인류 문화상의 한 관심사가 돼 있으며 우리로서는 이를 성공시켜서 한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언어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생겼다고 할 수가 있다.

 이와 관련해 이 글에서는 최근의 국내 보도를 보면서 느낀 한글에 대한 몇 가지 심각한 오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한글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자 한다. 오해에 근거한 열광은 자칫 한글 국수주의나 한글 쇼비니즘으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첫째, 한글과 한국어, 즉 글과 말은 구별돼야 마땅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 둘을 혼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세계에서 가장 진화된 언어라는 평가를 받는 한글은 세종의 개인 작품이다’라거나 ‘한글이 세계 속의 공용어로 더욱 발전하도록 국민 모두가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등의 글이 신문 기사에서 발견된다. 어떤 이는 “찌아찌아족은 말이 없습니까?”라고 심각하게 묻기도 한다. 이러한 몰이해 속에서 드디어는 한국어가 장차 인도네시아의 공용어가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천만의 말씀이다. 소수민족의 언어를 한글로 적을 뿐이다. 표기 수단일 뿐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전화가 온다. “훈민정음학회에서 한국어를 수출하는 일에 대해서…” “그게 아니고요, 한글을 나누는 일이죠.”

 둘째, 많은 사람들이 ‘한글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점을 맹신하고 있다.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표기 체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국의 언어를 적던 글자로 다른 민족의 언어를 제대로 적으려면 적절한 변용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어떤 언어에서 그 표기 수단으로 로마자를 채용할 때 변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례는 거의 없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에서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라도 모두 적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들리는 대로 비슷하게 적을 뿐 제대로 적은 것이 아니다. 다만 위의 글귀는 표의문자나 음절문자에 비해서 음소문자인 한글의 표음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점을 과장해서 말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한글과 세계화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위의 신문 기사 인용에서도 보듯이 유독 ‘한글’이라는 말과 ‘세계(화)’라는 말이 어울려서 쓰이는 일이 흔하다. ‘한글이 세계 유일의 독창적 글자’라는 문구에 너무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고 ‘한국어 세계화’라는 구호에 대응하는 말로 쓰기도 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한류 열풍으로 인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수요가 세계 여러 곳에서 급증하므로 이들로 하여금 한국어를 더 잘 배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글자가 없는 민족이 스스로 원해서 또는 권유에 의해서 자신의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 그들 소수민족이 속한 더 큰 사회 또는 국가에서는 이미 다른 글자로 언어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이라는 이질적인 문화를 들여오는 것은 큰 모험일 수 있다. 문화 충돌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 한글을 나누어야 한다. ‘세계화’라는 공격적인 개념으로는 일을 망치기 쉽다.

 사족으로, 유행하는 오해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1997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바 있는 세계기록유산은 한글 또는 훈민정음이 아니라, 흔히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불리는 1446년에 간행됐고 국보 70호로 지정돼 있는 책이다. 이것 역시 ‘한글’과 ‘세계’를 엮이게 한 오해의 한 근원이다.

 한글 나눔을 단지 글자의 수출 또는 보급의 측면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 세계의 언어학자들은 언어ㆍ문화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절멸위기에 처한 언어를 구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다. 한글이 이들 언어를 표기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류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는 일에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에 대해서 우리는 자만심보다는 자긍심으로, 베풂보다는 나눔의 시각에서 차분히 접근해야 할 것이다.  

김주원 / 훈민정음학회장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 서울대에서 「만주퉁구스제어의 모음조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사라져가는 알타이언어를 찾아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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