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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교회 다니는 과학자
[學而思] 교회 다니는 과학자
  • 이정모 안양대·과학사
  • 승인 2009.10.12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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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죄인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쳤지요. 이제야 진리를 깨닫게 됐습니다.”

    4년 전의 일이다. 평생 박쥐의 생태를 연구하다 은퇴한 전직 교수님은 전 교인을 상대로 한 과학강연을 이렇게 회개로 시작했다. 하지만 노교수님은 진화론이 왜 잘못이며 그것을 가르친 게 왜 죄인지 설명하지 않았고 또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에게 진화론은 가장 큰 죄의 덕목 가운데 하나라고 그저 인정되기 때문이다. 박쥐에 대한 그 분의 강의는 재미있었고 유익했다. 하지만 죄인으로 앉아있는 그 찜찜함이라니…….

    “집사님, 지구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요?” 노교수에 이어 내가 강단에 올랐다. 주제는 ‘인간복제와 장기기증’이었지만 교인들은 굳이 생화학자인 나에게 창세기에 대한 과학적인 확답을 기대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고민 끝에 대답했다. “지구의 나이는 약 6천 살에서 45억 살 사이입니다.”

    권사님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 안수 집사는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얼버무렸고 교인들도 대충 웃고 넘어갔지만, 빤한 과학적인 대답을 피한 게 매우 불편했다. 그리고 독일 유학 시절 지도교수와 겪었던 반대 상황이 떠올랐다. “뭐야? 교회에 다닌다고? 과학자의 탈을 쓰고서……” 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신사인줄 알았던 그는 말 그대로 노발대발했다. 항상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질문할 때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그의 변신에 놀란 나는 그날 이후 그에 대한 존경의 상당 부분을 포기했다.

    마치 내 삼촌이나 되는 냥 우리 가족을 돌봐주시던 독일교회의 장로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위로했다.“집사님처럼 신앙 좋은 분이 과학을 하느라고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때 깨달았다. 과학자는 교회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과학자가 있고, 신앙인이 과학을 하는 것은 양심과 어긋난 일이어서 정말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인이 있다. 이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꼬? 나는 머릿속에 스위치를 달았다. 실험실로 출근할 때는 채널을 왼쪽으로, 집으로 돌아오면 중립, 교회 갈 때는 오른쪽으로. 3채널 시스템도 괜찮았다. 채널 변환은 의외로 금방 익숙해졌고 다중인격(?)의 생활도 나름 재미있다.

    사실 그것을 해치우지 못했던 데는 스스로 성찰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10년 넘게 사용해온 3채널 시스템을 청산할 기회가 생겼다. 비정규직보호법의 친절한 ‘보호’를 받고 있는 박사학위 미소지 강의전담교수인 내가 계약의 마지막 학기에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과목을 맡게 된 것이다. 과목 이름에 ‘대화’가 들어 있으니 우리는 당연히 대화를 한다. 다행히 수강생 가운데 상당수가 지난 학기에 ‘과학기술과 사회의 대화’라는 수업을 함께 한 터라 토론은 초기부터 적극적이고 진지했다. 

    첫째 주의 토론 주제는 ‘굳이 과학과 종교가 대화를 해야 하는 접촉점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었다. 뇌과학과 종교, 인지과학과 종교, 창조와 진화 등의 여러 주제가 제안됐지만 ‘창조와 진화’가 쉽게 선택됐다. 학생들은 우선 자신이 믿고 있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간단한 에세이를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토론했다. 결론은 “내가 알고 있는 창조론과 진화론은 단 몇 단락의 에세이를 쓰기에도 벅찰 정도로 토대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넓은 스펙트럼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입장에 서서 각각을 경험하고 분석했다. 이때까지도 몇몇 학생들은 여전히 ‘젊은 지구 창조론’의 입장에 남아 있었지만, 이보디보(Evo Devo)라는 최근의 이론을 함께 공부한 후에는 ‘종의 변이’와 ‘오랜 지구’에 대부분 동의하게 됐다. 지난주에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중심으로 종교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강의했다.

    다음 주 학생들이 어떤 토론을 할지,그리고 이 강의를 통해 나는 채널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지 흥미진진하다. 올 겨울에 교회에서 과학강연을 할 때 내가 진화와 창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는 이번 학기에 학생들에게 얼마나 배우는가에 달려있다.

이정모 안양대·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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