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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실험과 ‘너무나 현실적인’ 요구들은 만날 수 있을까
미학적 실험과 ‘너무나 현실적인’ 요구들은 만날 수 있을까
  • 홍지석 객원기자
  • 승인 2009.10.0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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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시장으로 돌아간 현대미술: 재래시장 프로젝트

    1939년 미국의 모더니즘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자본주의 시장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특히 1960년대 앤디 워홀의 등장과 더불어 사실상 ‘시장으로부터의 탈주’는 불가능한 도전이며 탈주의 몸짓은 결국 위선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현대미술에는 ‘시장으로의 회귀’라 부를 수 있는 일련의 현상들이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우리미술계에서도 ‘시장으로의 회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일련의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전통시장 활성화 방안으로 추진하고 있는 ‘문전성시’ 프로그램이 현재 수원 못골시장, 서울 수유시장, 목포 자유시장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성남문화재단이 추진하는 ‘우리동네 문화공동체 만들기 프로젝트’가 상대원시장에서 진행되고 있고, 광주에서는 광주광역시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진행하는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또 안양 석수시장에서는 오래전부터 대안공간 스톤앤워터 주최로 ‘석수시장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들은 모두 ‘재래시장’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런 장소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예술형태를 제안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이들 시장으로 간 미술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시장상인들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설치물들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장식물과 랜드마크, 휴식공간 같은 것들이 두루 포함된다. 또 주말에 시장을 무대로 진행되는 공연 프로그램이나 예술 장터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상대원시장이나 못골시장에서는 별도의 방송국도 운영하고 있다. 또 시장 상인들과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는 못골시장 프로젝트의 상인상상교실과 상인요리교실처럼 직접 상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광주 대인시장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되는 ‘시장 通 술래단’처럼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도 있다.

‘재래시장’에 핀 레지던시 프로그램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들도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예컨대 석수시장이나 대인시장 프로젝트에서는 프로젝트 기금으로 시장 내 빈 상점을 임대해 작가들에게 짧게는 4개월, 길게는 1년 정도 작가들에게 작업실로 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공모 심사를 거쳐 시장 내에 입주한 작가들은 오픈 스튜디오 형식으로 정기적으로 자신의 작업 공간을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이렇게 공개된 작업실은 시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예술을 보다 가깝게 접할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 자신의 작업에 대한 다양한 논평을 접할 계기를 부여할 것이다.  

    이에 더해 다수의 시장에서는 현재 시장의 기억과 역사, 고유의 정서를 되찾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 결과는 소식지나 방송의 형태로 곧장 피드백되기도 하고 작가들의 작업에 축적돼 작품으로 발현될 것이다.    

    재래시장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확실히 지난 몇 년간 ‘공공미술’이라는 명칭 하에 진행된 다양한 실험들을 한층 성숙시켰다는 평을 받을만하다.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일회적 단기 프로젝트에서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로의 변화다. 적어도 우리 미술계에는 선례가 될 만한 과거의 유사 프로젝트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재 현장에서 기획자와 작가, 관공서가 긴 시간 경험을 통해 쌓아갈 노하우는 예술과 삶을 분리가 아닌 통합으로 가져가고자 하는 예술가들에게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기 프로젝트로의 변모는 대부분의 경우 문화체육관광부를 위시한 중앙부처나 지자체의 개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프로젝트가 이들 관공서의 일차적 요구, 즉 ‘재래시장의 활성화’라는 요구에 얽매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시장상인들의 갖가지 요구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구는 물론  ‘자유로운 실험’, ‘규제로부터의 탈피’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현대미술의 흐름과 충돌을 빚을 수 있다. 특히 눈앞의 지자체나 상인회가 눈앞의 가시적 결과를 강조할 때가 그렇다. 실제로 2009 ‘문전성시’ 프로젝트 가운데 목포 자유시장 프로젝트의 경우, 프로젝트 전체 내용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변경하라는 목포시와 상인회의 자의적인 요구에 반발해 9월초 기획자가 사임하고 그 결과 프로젝트 자체가 좌초 위기에 처해있다.

    한편 기획자 입장에서는 개인의 사고와 표현을 중시하는 작가들을 시장이라는 콘텍스트에 어떻게 편입시킬 것인가도 문제다. 아직도 우리 미술계의 대부분의 작가들은 공공성이나 콘텍스트 문제보다는 개인성, 텍스트 문제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기획자 입장에서는 기획 취지에 부합하는 작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보면 어느 프로젝트나 유사한 작가들이 참여하게 돼 개개 프로젝트의 개성을 살리기가 어려워진다. 어느 시장에 가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예술성을 방기하고 프로젝트가 요구하는 그때그때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해 작업하는 이른바 맞춤형 작가의 등장도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광장의 실험을 살릴 수 있는 길


    하지만 대안적 예술실천을 모색해 우리 미술계의 닫힌회로를 열린회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재래시장 프로젝트 같은 공공 프로젝트는 계속 시행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예술의 모색’이라는 미학적 요구와 더불어 ‘재래시장 활성화’ 같은 현실적인 요구들도 중요하다. 광주 대인시장 프로젝트 박성현 총감독의 말처럼 “버무려지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끝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재래시장 프로젝트의 산물을 어떻게 담론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시도 자체가 아직 우리 미술계에는 낯선 만큼 전국에서 벌어지는 있는 다양한 실험들을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논자나 매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기존의 논자나 매체의 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물론 새로운 논자나 매체의 등장을 기다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재래시장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작가들은 희망을 찾아 시장을 떠났던 그린버그와는 반대편에서 희망을 찾아 시장으로 돌아간다. 광주 대인시장 입주작가인 판화가 노정숙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시장과 예술이 결합하는 지점을 만들자는 열정이 있어서 참 재미있어요. (……) 작가가 그 속에 살고 누리면서 옛날의 시장 개념을 살리고 필요하면 나누고 돕고 서로 잘되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시장에 들어왔습니다.”

홍지석 객원기자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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