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7:20 (화)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시와 철학, 그 그물로 잡을 수 있는 물고기가 다른 까닭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시와 철학, 그 그물로 잡을 수 있는 물고기가 다른 까닭
  • 강신주 서평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 승인 2009.10.05 1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신주 서평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시집이나 철학책은 다른 장르의 글들보다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시의 경우 주관적이고 낯선 이미지들이, 그리고 철학책의 경우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 용어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인과 철학자가 친숙한 세계가 아닌 원초적으로 낯선 세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낯선 세계도 낯선 표현방식을 통해 보다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법이니까. 친숙한 삶에 ‘느낌’과 ‘위험’으로 충만한 낯선 세계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시와 철학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간혹 시와 철학이 독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와 깊이 관련있을 것이다.

 

흔히 너무 어려워서 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시집과 철학책을 멀리 하는 진정한 이유는 시나 철학이 자신의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듯한 불쾌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시나 철학이 난해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안정되고 친숙한 삶이 항상 소망스러운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詩는 時를 가지기 때문에 어려워 보인다. 시는 어떤 시간감, 즉 리듬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리듬은 시인이 무엇인가를 낯설게 느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새로운 말로 옮기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연을 하늘에 날릴 때 바람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처럼,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리듬을 시인의 그것에 맞추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물론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이런 시도도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시인이 느낀 것은 기존의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낯선 상처 혹은 어떤 감각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시에는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다. 시는 (기존의 말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말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말을 강제했던 시인의 낯선 감각도 공감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인의 생경한 표현에 충분히 적응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느낌으로 세계를 보고, 그에 따라 삶을 새롭게 영위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느낌을 기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것을 억지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더듬거리는 말처럼 우리의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새로운 사유 문법을 만드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바닷가의 한 어부가 새로운 그물을 만들려고 준비한다면, 이것은 그 어부가 기존의 그물망으로 잡을 수 없는 어떤 새로운 물고기 종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을 새로운 그물을 만드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엮는 이유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사유 문법으로는 포착되지 않은 무언가가 자신의 그물코를 지나쳤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니까. 이 점에서 철학의 출발은 시의 그것과 닮은 데가 있다. 철학자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기존에 사용하던 언어의 부적절함을 느낄 정도로 삶과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철학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철학자가 만들어 놓은 그물만 보아서는 그것으로 무슨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물을 바다 물에 던져보면, 누구든지 그 그물이 잡을 수 있는 것과 잡을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물속으로 직접 들어가 온갖 물고기를 몸으로 직접 느끼고 표현하려고 한다면, 철학자는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를 다시 확인하고 만져 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시는 주관적인 것이고, 철학은 객관적 혹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상이 생기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온몸으로 물고기를 경험했던 사람이 자신의 낯선 경험을 육지 사람들에게 들려주려 할 때, 그의 낯선 경험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반면 새로운 그물을 엮어 낯선 물고기를 뭍으로 끌어올려 보여준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전보다는 좀 더 쉽게 그 낯섦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시인이 들어갔던 물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시인이 느꼈던 낯선 물고기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반면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가 만든 어떤 그물을 물속에 던지면 그것에 딱 어울리는 특정한 물고기만 잡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는 주관적인 것 같지만 보편적이고, 철학은 보편적인 것 같지만 주관적일 수 있다. 그래서 시와 철학이 인문학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 인간의 경험 자체가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것으로 영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신주 서평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