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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과 현상학 접목한 ‘인지기호학’ 약진 … ‘움베르트 에코’ 반열에 오르다
인지과학과 현상학 접목한 ‘인지기호학’ 약진 … ‘움베르트 에코’ 반열에 오르다
  • 교수신문
  • 승인 2009.10.0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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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차 세계기호학 대회(스페인 아 코루나)를 다녀와서

지난 9월22일부터 나흘간 스페인의 고도 아 코루나에서 열린 제10차 세계기호학대회. 이번 대회는 기호학의 패러다임 이동을 보여줬다.

제 10차 세계기호학 대회가 스페인의 고도이자 갈리시아 지방의 수도인 아 코루나(A Coruna)에서 9월22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됐다. ‘소통의 문화, 문화의 소통’이라는 대주제를 설정해 진행된 이번 대회에서는 전 세계 60개국에서 약 1천 명 정도의 학자들이 40여개의 분과로 나뉘어 논문을 발표했으며, 10여개의 기조발제가 있었다. 특히 화상 발표로 진행된 에코의 세계기호학회의 발자취를 언급한 것과 살먼 루시디의 문화 간 상호 대화를 주제로 한 강연이 개막식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이뤄진 기호학의 살아 있는 역사를 소묘한 에코는 급속하게 발전하는 현대 학문의 융합화, 혼성화, 다원화 등의 역동성을 감안하건대, 모든 인문학을 포함해 기호학의 미래 역시 철저한 예측 불가능성에 놓여 있다는 점을 전제 한 후,  그 같은 안개 속에서도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서 문화계와 자연계를 통섭하며, 학문간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기호학의 고유한 역할만큼은 오히려 더 큰 가치를 갖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화상 발표 나선 에코, 연단 오른 살먼 루시디


이어서 연단에 오른 루시디는 디지털 기술로 인해 정보 총량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더불어 정보 수집은 갈수록 용이해지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지식의 희소화 대신 지식의 진부화로 인해 현대 디지털 문명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지식의 상실이라는 위기에 봉착했다고 역설했다. 특히 세계화와 글로벌 미디어, 상투화된 저널리즘으로 인해서 경이로워야 할 인간의 삶은 가장 진부하고 통속적인 차원에서 표상되고 있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인도 출신답게 200여개 이상의 언어가 일상 속에서 공존하며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 모호함속에서 소통하는 뭄바이에서의 경험을 전해주면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코드 스위칭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와 문화 코드의 변환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일종의 다중적 정체성을 경험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 글로벌 시대에서 진행되는 공간적 거리의 소멸과 모든 공간의 동시적 경험, 그리고 삶의 여백이자 공터라 할 수 있는 텅 빈 공간이 없어지면서 소설적 재원이 갈수록 빈곤화돼 있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개막 기조발제 이후, 진행된 40여개의 분과 세션에는 동서 기호학의 역사, 에코 기호학 사상 헌정, 그레마스 기호학의 유산과 현재성, 퍼스 기호학 사상의 현재성, 기호학과 고고학 등의 고전적인 분야 이외에도 도시 공간의 상상계와 도시 담론의 기호학, 트랜스 미디어 기호학 등의 새로운 분야가 선보였다. 시각 기호학의 대가인 클린켄베르그(Klinkenberg)는 에코가 최근에 발표한 저술을 분석해 새로운 평가를 시도했다. 즉, 구조 기호학의 형식화를 극복하고 의미와 경험의 문제를 신체성과 물질성의 차원에서 존재론으로 승화시키면서 의미의 자연화라는 문제를 천착했다는 점에서, 에코를 위상 수학과 기호학을 접목시킨 르네 톰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퍼스의 실재론을 계승한 기호학 사상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평가였다.

현대 기호학에서 이뤄지고 있는 형식주의에서 실재론에로의 패러다임적 이동을 반영하듯 구조 기호학보다는 퍼스의 기호학 전공자들이 숫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특히 인지과학과 현상학을 기호학에 접목시켜, 인지 기호학(cognitive semiotics)이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발하고 있는 덴마크의 아루스(Aarhus) 대학의 인지 기호학 연구소가 주도한 분과에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인지기호학자들은 무엇보다 의미의 발생 기점을 지각의 능동성과 예기(anticipation)에서 파악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상에서 이뤄지는 타성을 비롯해 문학 작품을 읽어가면서 독자가 파악하는 이해를 기존의 상투적 설명 방식인 독자의 상상력 대신, 사건의 추이 속에서 독자가 가동하는 회상과 지각적 태도를 인지과학 차원에서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내용을 실제 사례를 통해서 입증했다.

인지기호학의 이같은 새로운 인식론적 전환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레마스의 수제자로서 정치 담론을 중심으로 약 40 년동안 사회기호학의 독보적 업적을 내놓은 란도브스키 (Landowski) 박사는 기조발제에서, 기호학의 제도적 취약성과 방법론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기호학적 원근법의 독특한 사유 스타일을 언급한 후, 앞으로의 기호학은 존재와 생태의 문제를 핵심 연구 대상으로 삼을 것을 역설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타자와 자연에 대해서 젊은 기호학자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할 것을 당부했다. 

이점에서 행태기호학자인 이반 다로(Ivan Darrault) 교수는 그레마스의 초기 저술에서 이미 자연 기호학의 인식론적 정초가 이뤄졌다는 점을 환기한 후, 그의 기호학 이론의 핵심은 정태적인 추상적 모델보다는, 의미의 심층 구조에서 담화로 발현되는 표면 구조로 의미의 풍요로움을 발생시키는 변환(conversion)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그는 청소년들의 언어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그들만의 언어와 몸짓을 수 십 년 동안 연구한 결과, 그들의 행동 양식을 단순한 호르몬의 변화와 같은 자연과학적 인과율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기호학적 변환의 차원에서 새로운 몸의 탄생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언어와 몸짓의 창발로 이해할 때 더 많은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줬다.

국내 학자들 발표도 시선 끌어


이 밖에도 도시 공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시각적 기호 분석을 비롯해 세계 주요 도시 공간의 구체적 사례 연구가 소개됐다. 도시 기호학과 관련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동아시아 도시 공간의 텍스트 생태학’을 비롯해 서울의 대표적 소비 공간인 카페의 시각적 정체성과 한강 르네상스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최용호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세미오시스로서의 트랜스’라는 제목의 세션으로 열린 분과에서는 송기정 교수가 다룬 르클레지오 소설의 공간 기호학적 분석과 송효섭 교수가 발표한 한국의 전통적 무속 의례인 ‘굿’에 대한 논문이 관심을 좋은 반응을 유도했으며, 로트만 전공자인 김수환 교수가 경계와 트랜스의 문화기호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주었다.

이 밖에도 패션 이론 전공자인 최인순씨가 다른 초현실주의 의상의 토폴로지 기호학과, 국내 퍼스 기호학으로 학위를 받은 이윤희 박사가 발표한 ‘퍼스 기호학의 서사 커뮤니케이션’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작품에 적용돼 흥미로운 테마로 관심을 끌었다. 차기 대회는 2012년 중국의 난징대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됐다.

김성도  고려대·언어학과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호모 모빌리쿠스』『기호, 텍스트, 그리고 삶』등이 있다. 소쉬르 연구 동인회 정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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