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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학문의 주체성’ 수립 이전에 던져야 할 질문들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학문의 주체성’ 수립 이전에 던져야 할 질문들
  • 이현우 서평위원 서울대·러시아문학
  • 승인 2009.09.2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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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서평위원 서울대·러시아문학

‘학문의 주체성’ 혹은 ‘주체적 학문’의 정립이란 과제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한번쯤 부닥치게 되는 요구이다. 하지만 무엇이 주체적 학문이고, 학문적 주체성은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학문 사대주의’를 극복하자는 구호와 함께 우리 고유어나 고유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되살려 써야 한다거나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에 맞는 우리 이론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주장들을 더러 만날 수 있었지만, ‘우리 학문’과 ‘주체적 학문’을 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마음에 걸리는 말은 ‘주체’이다. 알다시피 이 ‘主體’는 ‘객체’에 대응하는 (철학)용어로서 ‘사물의 작용이나 어떤 행동의 주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참고로, 사전에는 ‘북한어’로서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서의 인민 대중을 이르는 말”이란 정의도 첨가돼 있다. 어떤 행동의 ‘主가 된다’는 말 자체가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대략 ‘주도하는 자’ 정도로 ‘주체’의 뜻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주인이냐 하인이냐, 상전이냐 머슴이냐는 구도에서 주인노릇하고, 상전노릇하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한데, 학문용어로서 이 ‘주체’가 영어 subject(프랑스어 sujet, 독어 Subjekt 등)의 번역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사정은 좀 복잡해진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juche ideology’라고 옮기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주체’는 대부분 ‘subject’로 옮겨지는데, 그렇다고 이 ‘subject’가 항상 ‘주체’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간추려도 ‘subject’는 주제, 주어, 신민, 주체 등의 뜻을 갖는다. 곧 주체와 subject는 서로 비대칭적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subject’가 주체(주인)이면서 동시에 신하나 국민 같은 피지배자를 뜻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subject’가 갖는 의미의 이중성이고 모호성이다. 

    이 ‘주체’의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를 따라서 니체의 한 문단을 읽어봐도 좋겠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지하는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복종하거나 복종한다고 믿는 그 무엇에 명령을 내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명령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복종하는 자이다.” 니체에게서 주체는 ‘명령하는 주체’와 ‘복종하는 주체’로 분열된다. 사실 ‘명령하는 주체’가 동어반복이라면, ‘복종하는 주체’는 모순형용이다. 중요한 것은 분열돼 보이는 이 둘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

    니체는 원문에서 마지막 문장 “그 결과, 그것이 바로 나이다”를 독어가 아닌 불어 “L'effet, c'est moi.”로 썼다.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유명한 말 “국가, 그것이 바로 나이다”(L'´Etat, c'est Moi.)를 그대로 패러디한 것이다. “지배계급은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성취를 동일시하는 것이다”라고 니체는 덧붙였다. 이러한 정치적 비유는 ‘주체’란 말의 본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절대군주는 법과 행정이라는 국가의 권력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립하고 행사하는 권력이고, 그의 신민들은 그러한 ‘권리 속의 주체’라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장 보댕의 이런 말도 음미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든 시민이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는 그가 복종하는 주권권력에 의해 제한받기 때문이다.”

    원래적 의미에서건 통용되는 의미에서건 주체(subject)의 자유와 강제, 의지와 복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러한 사실이 ‘주체적 학문’이란 요구에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주체적’이란 말로는 온전한 의미의 자유나 독립이란 뜻을 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서양학문과는 다른 독자적인 학문을 지향하면서 그것을 ‘주체적 학문’이라고 지칭한다면, 그때의 ‘주체적’이란 말은 ‘subjective’라고 번역될 수 없을 것이다. 어원적 의미에 충실하자면 ‘주체적 학문’은 자기 정립적인 자유와 예속이 교차하는 양다리 걸치기식 학문이다.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권력에 다시금 예속되는 시민의 처지에 견주어볼 수 있겠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주체’나 ‘주체적’이란 말은 기만적이다. 이 말들이 갖는 의미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다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문 사대주의는 아니더라도 서양학문에 대한 우리의 예속성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가를 잠시 잊게 만든다. 사실 ‘주체적 학문’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우리의 자발적인 문제의식인가도 의문이다. 우리의 의지가 복종에 근거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말이다. 따라서 ‘학문의 주체성’과 ‘주체적 학문’ 정립에 매진하기 전에 ‘학문의 예속성’과 ‘객체적 학문’이란 현실에 대해서 더욱 깊이 성찰해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인민 대중’으로서나 ‘시민’으로서나 우리에겐 ‘자유’라는 이념보다 ‘복종’이라는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현우 서평위원 서울대·러시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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