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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2) 분단체제론, 과연 ‘화두’인가 ‘과학’인가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2) 분단체제론, 과연 ‘화두’인가 ‘과학’인가
  • 김윤철 한국정치연구회
  • 승인 2002.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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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가 던진 전망의 그림…이론화 작업 미흡
우리신문 217호에서 이 기획을 시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을 두고 몇몇 일간지들이 보도하기도 했다. “지식 종속 깨뜨린 우리 이론 체계화”, “우리의 이론으로 한국을 보자” 등의 제목이 기사를 장식했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신문이 소개하려는 항목이 ‘이미’ 독창적이라거나 이론화 됐다는 인상을 주기 쉬운 표제이다. ‘우리’라는 말과 ‘이론’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모호함도 있겠지만, 이 기획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재검토’에 있음을 분명히 해둔다. 재검토하겠다는 말은 각 항목이 이론화 작업을 이루고 있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주장에 그친 것이 이론인양 행세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오늘날 우리 학문이 처한 위기와도 관련돼 있다. 현실과 괴리돼 있거나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지식.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하며, 없었다면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백낙청 교수가 줄기차게 주장해 온 ‘분단체제론’은 이런 의미에서 다시 검토해 볼 만하다. ‘세계체제론’의 한국적 버전이라는 혐의도 정치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김윤철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원은 나름대로 분단체제론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지 정리해주고 있다. 특히 이론화 작업에는 집단성이 필요하다는 그의 역설은 사뭇 긴장감을 안겨 준다. 분단체제론 논의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김윤철 /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원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1988년은 적어도 개인적으로 꽤 ‘역사적인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그 해는 87년 6월항쟁의 성과에 바탕해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선거를 통해 노태우 신정권이 출범한 해이기도 했으며,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1988년을 역사적인 한 해로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남북학생회담‘ 개최 시도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 사건이 분명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나는 내가 속한 ‘조직라인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동료들을 모아 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던 연세대학교로 잠입해 들어갔다.
이러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그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판단했는지에 대한 당시의 논리적 근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조직라인의 방침에 반발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동료들을 모아 연세대로 가기 위해서라도 분명 나름대로의 어떤 논리를 갖고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내가 분단과 통일이라는 문제는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어떤 강한 느낌을 갖고 있었고,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다시 전면화시키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어떤 ‘感’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한 感에 바탕한 미묘한 전율과 긴장은 이후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최근의 남북정상회담 때에도 반복 체험한 바 있다. 그 외에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임진각을 종종 방문할 때조차 그러한 느낌들을 갖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논리적 영역 이전의 문제, 즉 ‘역사적 감수성’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분단에 대한 대안논리로 등장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체험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시절 동안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구호 이상의 것, 즉 명확한 과학적 인식의 문제와 실천적 과제로까지 상승시켜내는 데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강조하는 논리와 그것에 반하면서 계급적 문제를 강조하는 논리, 그리고 그것에 바탕한 실천들이 분단과 통일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때문에 나는 다만 대학시절 중반쯤부터 분단과 통일이슈의 제기를 단지 정세돌출적인 것이라고만 파악, 통일이슈를 매개로 해 전개되는 정세의 또 다른 (그러나 연관되어 있는) 측면에 대해서는 무력함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에 원칙적 수준에서의 비판적 입장만을 견지하는 가운데, “남북한 관계를 국가간의 외교적 관계로 봐야 한다”는 ‘분단 순응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사고를 갖기도 했고, 대학시절을 마칠 때쯤부터는 “통일은 남북한 민중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정당하다”는 ‘통일당위론’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에 다다르면서 그저 냉담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렇게 분단과 통일문제에 대해 냉담한 태도 때문에 내가 분단체제론을 접하게 된 것은 -애독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창작과비평’을 즐겨 보는 구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처음 제기됐던 80년대 종반이라는 시점이 아니라, 그로부터 훨씬 뒤인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분단체제론을 나름대로 신중하게 독해했던 것은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이후에서였다. 그렇게 뒤늦게나마 분단체제론을 접하고 나서 그것에 대한 -이러 저러한 비판적 논의를 함께 고려한- 평가를 먼저 밝힌다면, 나는 분단체제론이 ‘한국정치학도로서의 공부길’에서 주요하게 의존할 수 있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앞서 내가 엄중한 ‘교수신문’의 지면에서 다소 장황하게 개인적 체험의 편린들을 들춰낸 것은 분단과 통일문제에 대한 냉담함과 그로 인한 분단체제론에 대한 뒤늦은 독해를 변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분단체제론에 대한 내 주위 또래 동료들의 부정적인 평가와 달리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나의 인식적 근원을 추적해보기 위해서이며, 이론에 대한 평가, 특히 그것이 우리의 것이냐의 문제를 평가하기 위한 보다 생생한 진술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차원에서였다. 즉 그간 분단체제론을 둘러싼 논쟁이 주로 ‘지식인 면허(증) 소지자’ 중심으로 매우 격식있고 엄숙한 논법으로 이루어져왔음을 고려,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분단체제론에 대해 긍정적인 것은 편집자의 요구대로 ‘우리’의 ‘이론’인가라는 잣대에 의거하여 볼 때, 우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역사적 개인’으로서의─개인적 체험에 바탕해 갖고 있던 문제의식, 즉 NL과 PD로 양분된 지형 속에서 분단과 통일문제에 대한 대안적 설명논리에 대한 필요성에서 분단체제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NL과 PD로 양분된 지형 속에서 배제돼온, 혹은 그 어느 한 쪽에 속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키워왔던 이들이 상당수 존재해왔음을 고려할 때, 분단체제론이 분명 우리의 이론적 노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분단체제론에 비판적인 논자들에 의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다.

분단체제론은 NL과 PD가 각각 강조하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남북한 지배세력과 민중간의 대립이라는─분단모순의 설정 속에서 통합하고자 했고, 세계체제를 구성하는 양대모순이 전한도적 차원에 걸쳐 형성된 분단체제라는 매개항을 통해 남한과 북한이라는 공간에서 각각 어떻게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발현·작동해왔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도 우리의 이론이며, 또한 주요모순 설정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소모전을 보다 생산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분석적 틀에 대한 모색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이론으로서의 면모를 일정하게 갖추고 있다.

근대 극복 등 자기 확장의 모습 보이기도

뿐만 아니라 분단체제론은 세계체제론의 문제의식에 입각, 분석단위로서의 사회를 남한과 북한이라는 일국적 차원이나 혹은 한반도 지역에 국한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체제의 차원으로까지 확장해냄으로써 우리가 무엇에 의해 지배받고 있으며,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누구와 함께 해야 하는가라는 지배구조 및 그것의 작동경로와 저항주체에 대한 인식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분석변수들의 다각화와 그것의 작동을 파악하기 위한 다원방정식의 설정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최근에 들어 분단체제론은 근대극복의 문제설정까지 포괄하고자 하는 자기확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분단체제론이 그간 남북한 사회의 현실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자 하는 이론적 실천에서 분단체제의 극복이 어떤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후에 대한 미래 전망의 문제까지 논의의 관심을 끌어냄으로써 이론이 갖고 있어야 할 미덕인 전망 제시라는 책임을 수행하고자 한다.

한편 분단체제론은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체제’와 ‘주요모순’ 등 개념문제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현실중심적’이면서도 유연한 입장에 입각해, 변화하는 상황과 변수들의 결합 및 작동방식에 따라 이론적 재구성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이론구조의 창출이라는 이론형성의 새로운 실험을 시도해오고 있다. 어쩌면 10년이 훨씬 넘는 긴 시간 동안, 민족문학론에서부터 출발해 근대극본론으로까지 이어지는 분단체제론의 자기생애가 가능했던 것은 끊임없이 분단체제론을 현실에 접목시키려는 (혹은 그 반대까지) 백낙청 교수의 개인적인 ‘집요한’ 이론적 실천의 수행에 바탕한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분단체제론이 갖고 있는 이 같은 열린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이론’못되고 ‘대중적 개념’에 머물러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론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과정에서 분단체제론이 ‘이론적 문제제기’ 혹은 ‘화두’로서는 몰라도 명실상부한 ‘이론’으로서 분명하게 자리잡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앞서 나는 “이론으로서의 면모를 일정하게 갖추고 있다”거나 “이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론 형성의 새로운 실험”이라는 식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사정은 백낙청 교수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백 교수는 분단체제론을 엄연한 이론으로서 구성해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 사회과학도들의 몫이라고 일관되게 강조해오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백낙청 교수는 우선 왜 그 긴 시기를 거치면서도 분단체제론이 분단체제를 ‘대중적 개념’(?)으로까지 성장시켜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론으로서 자리매김되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이론화의 작업을 왜 사회과학도들이 기꺼이 자기작업으로 수용하고 있지 않은지(혹은 못한지)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자기분석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백 교수는 이에 대해 사회과학도들의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의 지체’를 그 이유로 들고 있는 듯 하다. 사실 이러한 지적은 일면 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분단체제론에 대한 ‘분단결정론적 숙명론’, ‘과잉분단론’, ‘분단환원론’ 등의 혐의는 단지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의 지체라고 해버리기에는 무리가 아닌가 싶다. 즉 그것은 이미 백 교수에 의해 제기된 ‘분단체제론에서의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의 지체이지, ‘분단체제라고 불려지기 이전’, 혹은 ‘분단체제라고 부르지 않고 다르게 부를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의 지체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해서 봐야 하는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 대한 혼동은 백 교수가 “분단체제의 작동을 말할 때, 분단체제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분단모순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봐야 한다”는 식으로 분단체제를 이미 현실에서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보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고 있다.

즉 이것은 분단체제라고 호명하는 남북한체제의 현실이 분단체제론의 이론화를 위한 제요소들로 투입되는 식이 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로부터 분단체제론의 내적 구조는 열린 구조일 수 있으나 다른 이론적 구상들과의 관계에서는 매우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각자 다른 이론적 경로와 방식으로 분단체제의 현실을 인식하는 이들이 분단체제론을 이론으로서 수용하는데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종오 교수도 제기한 바 있지만, 어쩌면 분단체제론 자체가 사실은 대중적 개념화에 더 적합한 ‘담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 즉 이론적으로는 답변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로 얽혀있는 담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다시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중적 개념이 되었다는 이유로 분단체제론에 대해 회의하게 됐다는 이수훈 교수의 용도폐기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분단체제론 하나로 모든 남북한 현실을 설명하겠다는 것은 이론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분단체제론이 남북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이라고 할 때 사정은 달라지지만, 그 자체로 남북한 현실을 설명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현실의 복잡성을 설명하겠다고 하는 이론이 그 자체로 복잡하여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 혹은 현실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이 과연 이론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외에 나는 분단체제론의 이론화 작업이 사회과학도들의 과제라고 하는 백 교수의 요구가 현실적으로 수용되고 있지 못한 실정은 이론을 주로 개인적 작업의 소산이라고만 이해하는 근간의 우리 학계의 ‘개인주의적’ 연구풍토에도 이유가 있지 않은가 한다. 이것은 지난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의가 갖고 있던 나름대로의 건강성, 즉 논의수행과 입론과정에서의 ‘집단성’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으며, 그러한 집단성의 복원 과정에서 분단체제론의 이론화 작업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공상 아닌 공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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