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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름들’의 後光 … 깃발꽂기식 선점경쟁 지양해야
‘사라진 이름들’의 後光 … 깃발꽂기식 선점경쟁 지양해야
  • 교수신문
  • 승인 2009.09.2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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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 미술 작가 재조명, 어디까지 왔나

최근 곳곳에서 저평가됐거나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현대미술작가를 발굴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재조명 작업, 어떤 것이 있었으며, 어떻게 진행됐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본다.

최근까지 진행된 재조명 작업


△ 1991년 ‘이쾌대 작품전’(서울 신세계미술관). 1988년 납월북작가 해금조치에 따른 재조명
△ 1997~1999년 ‘근대를 보는 눈 전’(국립현대미술관). 유화, 조소, 공예 분야 잊혀진 작가 재조명. 새로 발굴된 작가와 작품을 미술사에 배치시킬 방안 모색.
 ·‘수난과 영광의 유민사-신순남 전’(1997. 해외 한인작가 발굴 촉진 계기),
·‘다시 찾은 근대미술 전’(1998. 개인소장가들에 수장돼 일반공개가 불가능했던 작가들의 작품 소개) 등.
△ 1998년 ‘박현기-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전’(문예진흥원 기획초대전).
△ 2001년 ‘배운성 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프랑스 유학생이 파리 벼룩시장에서 배운성의 작품 46점을 수집해 국내 공개.
△ 2006년 ‘잊혀진 작가 승동표 전’(국립현대미술관).
△ 2008년 ‘박현기 유작전- 顯現전’(대구문화예술관).
△ 2009년 ‘이병용 유작전’(국립현대미술관), ‘작가재조명-한성희·한순자전’(소마미술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저평가됐거나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는 현대미술 작가를 발굴해 업적을 조명하는 '발굴작가'展의 일환으로 이병용 유작전이 열리고 있다. 이병용은 1970년대 중반 파격적인 실험미술로 주목받았지만 1978년 30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활발히 작업했으나, 국내 화단에서는 거의 잊혀진 작가다. 전시는 미국에서 이병용이 제작한 ‘의자’. ‘고추’, ‘삶’ 연작들의 미적, 사회적 의의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소마미술관에서는 지난 17일부터 ‘작가재조명’이라는 주제 아래 신성희와 한순자의 작업을 재조명하고 있다. 1980년대 초에 프랑스로 가서 현재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들이다. 역시 활발한 작업 활동과 그 성취에 비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다.

작가 재조명은 미술사 연구의 가능성

    1990년대 이후 우리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발굴 또는 재조명 작업이 비교적 활발히 진행됐다. 우리 근현대미술사 연구와 서술이 어느 정도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 통치와 6·25전란을 거치면서 망실된 작품과 자료의 수가 너무나 방대하고, 기록과 작품 관리에 대한 인식 결여로 누락, 소실된 자료도 또한 많기에 새로운 작가, 작품의 발굴, 복원, 재평가의 성과에 따라서 기존의 미술사는 언제든 수정, 보완, 대체될 수 있다.

    작가의 발굴, 재조명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근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들라면 1988년 단행된 납·월북 미술가들의 해금 조치가 될 것이다. 이 해금 조치를 통해 이여성, 김주경, 배운성, 김용준, 이석호, 정현웅, 이쾌대, 정종여, 박문원, 임군홍, 강호 같은 잊혀졌던 굵직한 근대 미술인들이 대대적으로 발굴, 재조명될 가능성이 확보됐다. 이 가운데 이쾌대의 경우는 특히 극적이다.

미망인이 간직했다가 1991년 10월 서울 신세계 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쾌대 작품전’에서 공개된 그의 완성도 높은 대작들은 우리 미술계에 상상할 수 없는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 공개된 그의 유작들은 지금 1940년대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작업으로 자리매김돼 있다.  

    1988년 이후 진행된 납월북미술가들의 발굴과 재조명사에서 배운성의 발굴과 재조명은 다소 색다른 경우다. 18년간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이 작가는 해방 후 홍익대학교 미술과 초대학과장 등을 역임하다가 월북했다. 이후 잊혀진 작가가 돼 금기시되다가 1988년 이후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1999년 그가 파리에 두고 왔던 160여점의 작품 가운데 48점이 파리 벼룩시장에 나온 것을 당시 프랑스 유학중이던 한 불문학도가 일괄 수집해 국내 공개한 것이 중요하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린 ‘배운성’ 展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경로로 중요 납월북 작가들이 발굴, 조명됨으로써 우리 근현대미술사는 훨씬 풍족해졌다.

지난해 새롭게 조명된 박현기의 실험적 작업들이 눈길을 끈다(박현기 유작전-현현전’). 장기적 관점에서 작가 재조명, 작품 발굴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대구문화예술회관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새로운 작가와 작품의 발굴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특히 1997년에서 1999년까지 유화, 조소, 공예의 세 분야로 나누어 개최된 ‘근대를 보는 눈’展은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이 전시들은 잊혀졌던 작가와 작품 상당수를 새롭게 발굴, 재조명했을 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새로 발굴된 작가와 작품을 기존 미술사 서술에 편입, 배치시킬 방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또한 1997년 여름에 우즈베키스탄의 교포 3세 화가 신순남(니콜라이 신)의 작품을 소개한 ‘수난과 영광의 유민사-신순남’展은 해외 한인 작가들의 발굴을 촉발시킨 전시가 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1998년 덕수궁 분관에서 개최된 ‘다시 찾은 근대미술’展은 잊혀졌거나 오랫동안 개인소장가들에게 수장돼 일반공개가 불가능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소개함으로써 우리 근현대미술사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 때 새롭게 부각된 중요 작가로는 구종서, 김만형, 김홍식, 승동표, 정종여, 이석호, 진 환, 나상윤, 전화황, 조양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승동표의 경우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98년 이후 진행된 그의 작품 발굴과 연구 성과를 모아 2006년에 ‘잊혀진작가 승동표’展을 개최하기도 했다. 장영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이 전시를 통해 소개된 승동표의 입체파적 분석 작업이 우리 미술에 드문 분석적 화풍의 이지적 접근 사례를 제시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분단 이후의 한국미술사 서술에서도 작가의 발굴과 재조명은 중요하다. 전시의 형태로든 담론의 형태로든 별다른 조명이 가해지지 않은 채 그저 이름만 신화처럼 떠다니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적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서 박현기의 이름 새롭게 부각되고 담론의 중심부로 부상하는 과정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홍익대 회화과와 같은 대학원 건축과를 마치고 1970년대 중반 대구로 내려가 2000년 작고할 때까지 대구현대미술제 등 대구미술계를 중심으로 활동한 박현기의 실험적 작업들은 오늘날 서구 매체에 한국적 정서를 불어넣은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김홍희)로 평가된다. 하지만 당시 그의 작업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70~1980년대의 한국 상황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비디오 작업은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계에서 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8년 9월 문예진흥원이 한국현대미술 기획초대전의 일환으로 개최한 ‘박현기-비디오 인스톨레이션’展을 전후로 그의 이름과 작업은 큰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비평 담론들이 다수 발표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중반 설치미술과 미디어작업의 일대 붐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무렵에 시작된 1970년대의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에 대한 재조명 작업과도 무관치 않다. 2008년 10월에는 지역 작가 발굴의 차원에서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대규모 박현기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한국적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서 박현기를 지역작가로 재조명하는 일은 대구시의 이미지 재고와 직결될 것이다.    

    이렇듯 1990년대 이후 우리 미술계에서는 작가, 작품의 발굴과 재조명 작업이 비교적 활발히 이뤄졌다. 거시적 수준에서든, 미시적 수준에서든 한국근현대미술사는 훨씬 풍성해졌고 담론은 심화됐다. 보존과 기록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작품 소장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 미술계의 작품 관리 현실을 감안할 때, 흩어지고 숨겨진 작가와 작품의 발굴과 공개는 그나마 남아있는 작품의 온전한 보존과 관리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장기적 발굴 프로젝트의 부재

    하지만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 발굴과 재조명 작업이 깃발꽂기식의 선점경쟁 형태로 진행된 감도 없지 않다. 특히 장기적 계획 속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작가, 작품 발굴 프로젝트의 부재는 아쉽다. 지금 진행되는 발굴과 재조명 작업에서는 당위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병용 유작전이나 신성희, 한순자 재조명 展이 ‘해외 이주 작가들의 발굴과 재조명’이라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 아래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새롭게 발굴, 재조명된 내용을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미술사 서술에 어떻게 반영할지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홍지석 객원기자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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