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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동료들과의 경쟁 무대가 아름다운 이유
그래도 동료들과의 경쟁 무대가 아름다운 이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09.21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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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연구실, 은밀하고도 직설적인 발상들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제임스 듀이 왓슨 저 | 김명남 옮김 | 이레 | 2009
『이공계 연구실 이야기』유영제 저 | 동아시아 | 2009

이공계 연구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경쟁’이란 단어가 아닐까. 실생활에서 ‘쓸모 있음’이 확인되지 못하면 어김없이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생존을 위한 자기 경쟁, 동료들과의 더 팽팽한 긴장이 암묵적으로 내면화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제임스 듀이 왓슨의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이레, 2009.6)와 유영제 서울대 교수의 『이공계 연구실 이야기』(동아시아, 2009.8)는 이렇게 살 떨리는 과학자들의 ‘연구실’을 화두로 삼은 책이다. 왓슨의 녹록치 않은 관록이 묻어나는 생생한 이야기와, 안간힘을 다해 토끼에게 이기고자 애쓰는 거북이의 운명 개조를 고민하는 유영제 교수의 솔직 시원한 글은 결국, 어떻게 과학과 공학을 창의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겹쳐진다. 

“나는 1928년 책, 새, 민주당을 믿는 시카고의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맏이였고, 2년 뒤에 여동생 베티가 태어났다.” 첫 두 문장만 보면, 다른 자서전의 주인공이 다 그런 것처럼, 이 문장의 주어도 어떤 사람인지 알기란 무척 어렵다.

이 문장의 주어는 이후 1951년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염기서열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왓슨이 크릭과 함께 선수를 치던 그 무렵, 런던 킹스칼리지의 모리스 윌킨스,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X선을 유전자에 쏘면서 DNA구조를 밝히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컬럼비아대에서는 어윈 샤가프가 역시 DNA 염기 비율을 성공적으로 밝혀내던 찰라였다. 칼텍의 라이너스 칼 폴링은 단백질의 폴리펩타이드 사슬과 알파나선 구조에 관한 결정적인 논문을 발표한 상태였다. 요컨대, 왓슨의 지적 성취에는 언제나 경쟁적인 실험 과정과 각지의 ‘高手’들과의 치열한 긴장이 도사려 있다는 말이다.

왓슨 자신의 회고에 의해 기술된 자서전이란 점에서 자기 과시와 자기 합리화를 피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자서전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편린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몇 가지 충고들까지야 몰라라 할 수는 없다. 왓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과학자의 성장사로서는 그다지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지 모르지만, 내가 험난한 과학계와 학계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회상해보는 과정에서 나름의 조언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험난한 과학계와 학계 헤쳐나가려면


왓슨이 들려주는 이 처세적 교훈은 이런 식이다.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연구실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지 마라’, ‘시대에 앞선 것이 분명한 목표를 선택하라’, ‘항상 구원자를 마련해두어라’는 등의 조언을 한다. 대학 내에서 주요한 교수의 위치 혹은 과학 행정가의 위치에 있는 학자들에게는 ‘학계 조직은 쉽게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신설 학술지의 편집진으로 참여해라’, ‘인기를 잃어가는 분야의 연구자에게는 절대 종신재직권을 주지 마라’, ‘골프에 맛을 들이지 마라’, ‘기부 요청을 거부당했을 때 절대 화난 모습을 보이지 마라’ 등의 조언을 들려준다.

왓슨이 ‘험난한 과학계와 학계를 헤쳐 나가기 위해’ 취한 태도는 그가 處世에 상당히 능한 사람임을 보여주지만, 그는 자신의 이런 처세관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것 같다. 책 출간을 맞춰 영국의 한 신문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가져올 파장을 알면서도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뱉어냄으로써 그는 40년간 재직했던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 소장 자리를 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정치 논리와 경제·비즈니스 논리로 가치가 평가되고, 입심 세고 관계에 능한 학자들이 패러다임과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는 왓슨의 고백은 ‘처세가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라고 해석하기보다, 그만큼 과학자들조차 객관적 사실에 의해 연구하고 발표하기가 어려운 구조 속에 던져져 있다는 역설로 해석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DNA 이중나선의 발견자이자 생존해 있는 가장 유명한 생물학자의 자서전, 그리고 여기에 담긴 과학자들의 연구실 풍경은 한 위대한 과학자의 탄생뿐만 아니라, 그의 성장 과정 전체에 깃든 사회적 갈등 흔적까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럼에도 과학은 전진한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연구는 피카소 플러스 알파’라고 생각하는 유영제 교수의 『이공계 연구실 이야기』는 제목에 긴장감이 동반되지 않았을 뿐, 실제 수록된 내용은 긴장의 강박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책이다. 곳곳에서 공학자들의 푸념이 들려오고, 여기저기 ‘이공계 위기’라는 말이 가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유 교수는 푸념대신 발상의 전환을 들고 나온 셈이다. ‘토끼와 거북이론’이 그가 내세우는 핵심 비유다. 토끼에 비해 신체적으로 열등하고 걸음도 느린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려면? 책에 수록된 내용들 하나하나가 바로 이 ‘이기는 방법’을 모색하는 글들이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기, 첨단 기술과 정보를 활용하기, 자기 적성에 맞는 長技를 살릴 수 있는 일 하기, 몇 년 후를 내다보고 장기적으로 생각하기라는 일견 흔하게 보이는 네 가지 아이디어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미덕은 다른 데 있다. 그는 실패를 직시하자고 말한다.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갖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실수로 예상외의 결과가 나오면 왜 그러한 결과가 얻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실수 중에는 가끔 쓸모 있고 획기적인 결과로 연결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위로하고 실수를 이겨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원칙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그래서 그는 책 한가운데 바로 그런 동료학자들의 고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기이식을 연구하는 안규리 교수, 나노물질 연구의 현택환 교수, 분석화학 연구의 김희준 교수, 분자생물학 연구의 노정혜 교수, 제어계측 연구의 이장규 교수 등 자기 분야에서 오랫동안 외길 연구에 몰입해 온 학자들의 경험담과 연구 노하우를 곁들인 것이다.

연구 잘하기 위한 6가지 방법 제시
무엇보다 ‘연구를 잘하기 위한 6가지 방법’을 제시한 대목은 이공계 분야가 아닌 연구자들도 슬쩍 곁눈질해도 좋을 내용이 틀림없다. 창의성을 계발할 것, 한 우물을 팔 것, 끈기 있게 노력할 것, 팀워크가 중요하다, 연구의 기쁨을 생각할 것, 발표 능력을 키울 것 등인데, 역시 새로운 방안이라곤 없다. 역시 ‘기본기’의 확인이니, 연구라는 게 인문사회분야나 이공계, 예술 어디든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 교수는 부록으로 연구 지원 하는 곳과 연구윤리 가이드라인을 덧붙였다. 이공계 교수의 꼼꼼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구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인센티브에는 무엇이 있을까. (중략) 연구의 결과는 인류의 지적재산이며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된다. 나를 위하여 살되, 인간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연구자의 보람이요, 최고의 인센티브인 것이다.” 왓슨은 연구자의 성공에도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유 교수는 ‘연구를 즐길 수 있다면 족하다’고 말했다. 우수 두뇌가 이공계를 떠나는 현실에서 유 교수의 제언이 더욱 값지게 읽힌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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