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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에게 부족한가?” … 새로운 철학을 찾는 질문들
“무엇이 우리에게 부족한가?” … 새로운 철학을 찾는 질문들
  • 김정현 부산대 HK 연구교수
  • 승인 2009.09.14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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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탕쿠르 독일 브레맨대 교수, 부산대에서 ‘상호문화철학의 의미’ 강연

독일 선교학연구소(MWI) 소속으로 브레맨대 교수직을 겸직하고 있는 베탕쿠르교수는  부산대 인문한국(HK) ‘고전번역+비교문화학 연구단’(단장 주광순, 부산대 철학과)을 구성하고 있는 인문학연구소와 점필재연구소의 공동 초청으로 지난 2일부터 이틀동안 ‘라틴아메리카 철학의 역사와 현 과제’, ‘상호문화철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제목으로 부산대에서 강연했다. 그의 강연과 토론을 정리했다.

“무엇이 우리에게 부족한가?” “무엇이 우리에게 빠져 있는가?” 상호문화철학이 기존의 철학 패러다임과 다른 것이라면, 그 다름의 정신을 표현할 상호문화철학의 중심 질문으로 어떤 것을 제안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베탕쿠르(Rau´l Fornet-Betancourt)교수가 답한 내용이다. 

베탕쿠르 교수의 이번 두 강연은 토론 시간이 강연시간과 엇비슷하거나 더 길었다. 그는 조용하고 진지하게 질문을 경청했고, 때로는 머뭇거리며 그러나 시종일관 최선을 다해 답하고자 했다. 강연 시작 전 피력한 대화의 시간이 길었으면 한다는 바람, 질의 시간에 보여준 진지한 경청, 머뭇거림 등 이 모든 것들은 상호문화철학의 정신의 실천이 아니었나싶다. 

 
대중과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첫 강연에서 베탕쿠르 교수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은 철학이 관계할 수 있는 세 가지 차원―로고스 차원, 에토스 차원, 파토스 차원―중 로고스 차원에 치중했다는 언급으로 시작했다. 물론 생철학, 현상학 등이 여타의 차원을 다루기는 했지만 대체로 추상적, 개념적 작업으로 끝났다고 평가했다. 그는 뒤이어 ‘라틴아메리카’라는 표현에 담긴 허구를 지적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표현 자체가 유럽인의 작명이며, 그들은 아메리카를 발견(Entdeckung)하는 동시에, 아메리카를 은폐하기(Verdeckung)도 했다. 라틴아메리카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자문하기 시작했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철학적 의미를 묻기 시작했다.

“서양중심적 철학사는 지역적 사유 유산”


라틴아메리카의 철학자들은, 철학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돼야 한다는 근본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의식 위에서 자신들의 과제를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근본 의식에서 라틴 아메리카 철학은, 한편으로 철학적 반성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현실과 문화적 전통과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인간과 인간문화의 해방을 지향한다.

이러한 시도와 지향은 철학에서 견지되고 있는 이른바 유럽중심주의와 필연적으로 대립관계를 형성하며, 이 대립은 기존의 서양 중심적 철학사를 해체해 그것이 보편적 유산이 아니라, 지역적 사유 유산임을 드러내려는 기획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 철학의 새로운 시도와 지향에서 파생됐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철학의 비판은 문화적 경쟁도 문화적 고립화도 의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이 의도하는 것은 유럽적 관념들을 극복함으로써 타 문화의 자율에 대한 확고한 인정을 위한 지평을 발굴하는 것이다. 문화적 자율을 강조한다고 해서 정신적 변방으로 퇴행하자는 것은 아니다. 민족 혹은 민중(Volk)의 문화정체성이 농축된 고유한 문화전통의 열린 긍정을 의미하며, 문화들 사이의 참된 대화는 민족들의 문화적 자율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이다.

두 번째 강연은 소수의 연구자들을 향해 상호문화철학의 내용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그는 기존 철학의 패러다임이 전환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것은 서양 철학의 전통적 패러다임들이 공통적으로 단일문화성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문화철학에 대해서는, 이 철학의 전제들 혹은 출발점들과 이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있는 바를 중점적으로 소개했다. 특히 기존 철학과의 차이를 확인하기에는 그 전제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적절한데, 다음과 같이 철학 혹은 운동의 성격과 지향점을 정리할 수 있다.  

1. 문화는 철학이라 부르는, 특수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철학의 탈서구화, 혹은 지역화의 필연성이 도출된다.

2. 이러한 지역화는 철학의 탄생지의 다원성을 지시할 뿐 아니라, 제도적 형식에서 확인되는 차이의 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지배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는 철학적 표현형식들―대학 강의, 전문 출판, 철학 강연회 등―외에 다른 형식들도 ‘전문적’인 것으로 인정돼야 한다.

3. 상호문화철학은 맥락화된 철학을 지향한다. 이것은 유일한 그 철학을 구체화(inkarnieren)하거나, 대중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 번째 전제는 문화적 맥락의 가치 절상을 위한 하나의 요청으로서, 철학과 문화의 상관성을, 다시 말해 문화는 철학적 사유의 토양이며, 동시에 문화는 철학적 사유에 의해 형성되기도 함을 주장한다.    

4. 상호문화철학은 보편적인 것, 혹은 보편성에 대한 요구를 부정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부정되는 것은 특정 질서 속에서 구성된 것으로서의 보편성일 뿐이다. 보편성은, 번역의 과정이기도 한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성취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다. 문화적 세계들은 번역되며, 보편성은 그 세계들이 상호 번역됨으로써 산출된다.

5. 상호문화철학은 철학적 반성의 패러다임으로 여겨지는 전승된 철학적 이성의 모델을 불신한다. 그 이유는 이 모델이 서양의 단일문화성(Monokulturalit¨a)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상호문화철학은 합리성의 타당한 형식의 형성과정을 역사화하고, 그 형식을 검증할 것을 제안한다. 이 모든 전제들에서 출발하는 상호문화철학의 궁극 목표는 바로 ‘철학의 새로운 변형’이다.

강연 후 몇 가지 질의와 그에 대한 응답이 있었다. 우선 문화적 맥락이나 전통의 강조에 수반되는 정체성 문제를 묻는 질문이 제기됐다. 상호문화철학이 분명 혼종적 정체성을 주장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흔히 논의되고 있는 정체성의 부정적 측면들, 특히 개인에게 억압으로 작용하는 전통의 폐해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냐가 질문의 핵심이었다. 그의 답변은 전통과 개인의 자유를 대립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개인은 책임 있게 전통을 전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의 지속적 재해석이 요구된다로 압축됐다.

기존 철학에 대한 전면적 재사유 시도
상호문화철학과 초민족주의 혹은, 초국가주의의 관계를 묻는 질문도 있었다. 그는 질문에 정확히 상응하는 답변은 아닐 수 있겠다고 말하며, 상호(inter)문화성, 다(multi)문화성, 초(trans)문화성의 차이를  설명했다. 다문화성을 주장하는 다문화주의는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다양한 민족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정치적 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깔고 있다. 다문화주의는 문화의 다수성을 인정하지만, 대체로 하나의 주류문화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여타의 문화들은 하위문화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 주류문화의 변화 가능성은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초문화주의는 전지구화의 진행 속에서 부각된 입장이다. 이 입장은 문화적 정체성을 혼종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측면들이 존재하며, 또한 이러한 정체성은 문화의 전수, 문화 간 대화를 위한 토대를 약화시킴으로써 우리의 문화적 삶을 빈약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상호문화철학이 문화철학과는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도 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문화철학은 문화를 탐구 대상으로 한 철학의 하위 분야로서 독일어 문화권에서 태동한 것이다. 문화를 말하면서 어떻게 가치와 규범을 함께 말할 수 있는가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에 비해, 상호문화철학은 각 문화 속에 있는 개념, 로고스 등을 논의한다. 이런 점에서 상호문화철학은 기성 철학의 한 하위 분야가 아니라, 기존의 철학에 대한 전면적 재사유를 시도하는 철학이다.

김정현 부산대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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