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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비밀, 왜 ‘철학자’는 살고 ‘정치학자’는 죽는가
통섭의 비밀, 왜 ‘철학자’는 살고 ‘정치학자’는 죽는가
  • 이광일 자유기고가·정치학
  • 승인 2009.09.14 1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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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심광현 저 | 문화과학사 | 2009 | 496쪽

 

『유비쿼터스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심광현 저 | 문화과학사 | 2009 | 496쪽

필자가 『유비쿼터스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학문, 예술, 사회의 통섭을 위하여』(문화과학사)를 읽으면서 떠올린 것은 다음의 질문이었다.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지금 우리는 누구와 맞서 싸우고 있으며 그것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이 질문은 자연과학, 인문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의 관계에 대해 무지한 정치학도로서의 필자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통섭’을 말하는 유수의 학자들이었다면 다른 질문을 던지며 이 책을 읽어 내려갔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질문에서 ‘누구’를 이명박 정권으로 치환시킨다면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무엇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저서가 지니는 의미는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먼저 그 하나는 ‘현재로 나타난 과거’에 대한 성찰이다. 이미 서구를 지배한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를 시나브로 질식시키기 시작했을 때, 당시 진보를 자임하는 논자들조차도 그것을 미국의 상품 및 자본시장에 대한 개방 압력 정도로 이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그들의 진단 또한 이 책이 주목하는 지구적 수준의 과학기술혁명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러한 인식의 한계가 권력과 자본을 독점한 자들과 그 언저리에서 그들을 조력하고 있는 자들을 위한 ‘2%의 사회’, 즉 ‘신노예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한다면 너무 과도한 것인가. 

    ‘유비쿼터스시대’라는 지금, 자본과 국가권력은 하나의 몸이 돼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구현하고 있는데, 여전히 과거처럼 자연과학은 현실 삶의 외적인 배경으로 존재한다는 발상이, 또 정치는 자본의 외부에 있다는 류의 이런저런 주장들이 수많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아니 통섭을 말하는 이들조차 이런 경향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까.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은 학문간 벽이 너무 높아서라는 진단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 이유는 그러한 설명이 분과학문 자체의 독자성을 전제한 학제 간 연구에 자족하는 경향에 강하게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저자는 어떤 진단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는 이것을 “비공시적인 선형적 인과성”으로, 즉 공시적 갈등들 가운데 어떤 하나를 원인으로 그 나머지를 결과로 파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해법으로 현실을 “비선형적인 순환적 상호작용의 공시적인 변증법적 과정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제안은 사회관계들의 맥락에서 사회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차원이 결코 자연과학에 외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통섭론자들과 달리 과거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는 강한 흐름, 즉 ‘비공시적 선형적 인과성’에 의한 지식권력의 독점, 그에 근거한 분과학문의 고착 및 위계화를 경계하면서 ‘함께 도약하기’(jumping together)를, 統攝이 아닌 通攝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현재화된 미래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다. 여전히 조지 오웰의 『1984』등을 그저 ‘반공소설’ 쯤으로 생각하고 영화 ‘매트릭스’를 보며 그것을 먼 미래의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오산이다. 그것은 극단적인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 속에서 파괴되는 대중의 자기지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 이 사회에서 그런 ‘과학적 디스토피아’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통섭을 단지 학문 사이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아니 그에게 그런 통섭은 아예 현존하지 않는다. 그가 “문화사회로 갈 것인가, 통제사회로 갈 것인가”의 질문을 던지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절절하게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그가 주목해 온 ‘GNR혁명의 시대’, 자연과학이 인간의 모든 삶의 부면과 분리될 수 없는 ‘유비쿼터스 컴퓨팅시대’가 도래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가 다른 통섭론자들과 다르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학술운동과 사회운동의 이념적 통섭과 프랙탈 네트워크에 할애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미래는 오직 현재의 불균등한 사회관계, 따라서 억압적 권력관계들을 매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저서는 이 점을 놓치지 말라고 시종일관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이들, 특히 통섭을 말하는 이들 속에서도 그것이 마치 새로운 발견인 양 착각하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통섭이 낯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은 이미 통섭을 해왔다. 그들은 외적으로 ‘쪼개어진 분과학문들’에 의해 표현되는 각각의 관계들이 실제로는 밀접히 연결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 어떤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접점에 자신들이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비밀’이 간직돼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보이는 현실만을 해석하는 ‘철학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 접점의 비밀을 공론화하고 그것을 대중과 함께 새로이 전유하려 하는 ‘정치학자’는 추적당하고 억압받는다. 아니 철학자가 정치학자라는 것을, 자연과학자가 철학자이자 정치학자라는 것을 말하는 이는 먼저 죽는다. 지금 이 책의 저자가 권력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아마도 저자가 아니라 권력의 뜻을 따르는 그 누가 문제의 ‘U-AT통섭교육’을 주도했다면 그것이 무애 그리 큰 사건이 됐을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 지점의 연장선에 이 저서가 좀 더 고민해야 할 것 또한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과학기술과 인문사회과학 간의 대화의 최초 가교를 예술, 특히 미학에서 찾고 있는데, 이러한 접근은 비대칭적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로부터 독립돼 있는 ‘예술의 중립성’이라는 통상적인 발상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강화시킬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즉 그러한 발상에 근거한 예술만큼 ‘권력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저자는 이 세 부문이 현실 속에서 밀접하게 절합돼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러한 효과들은 저자의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발생한다.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예술은 현실을 추상화시키는 정도에 비례해 ‘소통의 도구’로서의 지위와 효용성 여부를 부여받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통섭의 내용과 방식을 둘러싼 문제는 저자에게 좀 더 많은 실천적 논의와 대화의 필요성을 그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이광일 자유기고가·정치학

필자는 노동정치, 민주주의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등의 저서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의 공저가 있다. 성공회대 연구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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