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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들 유행어 된 ‘발명’, 역사의 중층성 단순화할 위험성 크다
일부 학자들 유행어 된 ‘발명’, 역사의 중층성 단순화할 위험성 크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09.07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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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규 고려대 교수, <창작과비평> 가을호에서 ‘통일신라’ 담론 비판

김흥규 고려대 교수(국문학)가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신라통일 담론’을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창작과비평>가을호(통권 145호) ‘논단과 현장’에 발표한 「신라통일 담론은 植民史學의 발명인가-식민주주의의 특권화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에서다.

김 교수의 글은 시원시원하게 정리돼 있다. 그의 말인즉, “‘통일신라’라는 관념이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발명이라는 최근의 주장을 비판하고, ‘삼한/삼국통일’ 담론이 7세기 말의 신라에서 형성돼 조선후기까지 여러차례 재편성과 轉位 과정을 거치면서 동적으로 존속해왔음을 해명”하는 한편, “근년의 탈민족주의 논의가 근대 및 식민주의를 특권화하고 역사이해를 부적절하게 단순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전자에서 문제 삼는 ‘최근 주장’의 소재지는 윤선태 동국대(역사교육)·황종연 동국대(국문학) 교수다. 황종연 엮음으로 된 『신라의 발견』(동국대학교출판부, 2008)에 수록된 황 교수의 글 「신라의 발견: 근대 한국의 민족적 상상물의 식민지적 기원」과 윤 교수의 글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역사학의 성립」이 빌미를 줬다.

김 교수는 이 두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지면을 거의 할애했다. 황종연·윤선태 교수의 논의가 기댄 거점은 하야시 타이스께(林泰輔, 1854~1922)의 『초오센시[朝鮮史]』(1892)다.  두 교수의 주장을 들여다보자.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인식은 하야시 타이스께의 연구에 따른 것이며, 이렇게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라는 담론은 ‘일본 근대역사학의 도움으로 등장한’ ‘근대의 발명품’이었고,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그 자긍심과 달리 식민주의 담론의 차용에 의존해 비로소 민족통일의 위대한 과거를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7세기 이래의 수많은 증거와 담론들 무시”

김 교수는 이들의 논의를 두고 “윤선태는 7세기 이래의 수많은 증거와 담론들을 무시하면서 그릇된 논증을 만들어냈고, 황종연은 이를 참조해 민족주의적 관념과 상상의 피식민성을 논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다”고 비판한다. 김 교수는 이미 지난해 <현대비평과 이론> 2008년 가을호(통권 30호)에 「정치적 공동체의 상상과 기억: 단절적 근대주의를 넘어선 한국/동아시아 민족 담론을 위하여」를 발표, “한국사의 특정 국면에 대한 논의와 함께 근간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담론 상황에 대한 범례적 문제제기를 지향”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도대체 이들 두 교수의 주장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김 교수는 네 가지를 지적한다. ①하야시 타이스께의 영향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강운동기의 대다수 역사서들을 논의에서 제외했다. ②하야시 『초오센시』의 신라통일 서술을 과장 해석하고, 해당 대목에 『삼국사기』가 다량으로 차용된 것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했다. ③ 7세기 말 이래의 각종 자료와 역사서에 풍부하게 나타나는 삼국통일 담론을 외면했다. ④전근대 사설들을 살피지 않고 文一平(1883~1939)의 신라통일 요인론을 하야시의 차용이라 간주했다. 사실 ③,④항은 ①,②항을 보완, 반증하는 내용들이므로, 비판의 요체는 ①,②항에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①과 관련 김 교수는 “여타의 역사 교과서들서도 신라의 통일이라는 내용은 하야시의 영향과 무관하게 자주 등장했다”고 지적하면서, 學部에서 편찬한 『조선역사』(1895) 등의 근거를 제시했다. “대다수의 편년체 교과서들은 통일기를 뜻하는 ‘신라기’를 그 이전의 ‘삼국기’와 분리함으로써 체제상으로 신라통일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면서, 윤 교수가 “이 모두를 논의에서 제외하고, 『초오센시』의 역술에 의한 저작은 3건이나 되는 것처럼 과장함으로써 이 시기의 역사 이해를 작위적으로 단순화했다”고 각을 세웠다.

김 교수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윤 교수가 “『초오센시』를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원으로 만들기 위해 무리한 논증과 해석을 여러차례 감행했다”고 지적하면서, ‘一統三韓’의 의미, 삼국통일 시점의 설정 문제를 면밀히 고증했다. 특히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윤선태 교수의 입론이 서로 충돌하기까지 한다고 주장했다. ②항의 문제설정이기도 한 이 부분을 확대해보면, ‘하야시 『초오센시』이전에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관념 내지 담론이 없었다, 그러나 전근대의 신라통일론이 있었으나 통일 시점에 대한 인식에서 하야시의 그것과 다르다’는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윤선태 교수는 “하야시는 신라의 통일이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마침내 통일의 업이 이뤄진 것으로 기술”했다고 보았다. 김 교수는 하야시의 『초오센시』 어디에도 그런 구체적인 서술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럼에도 이런 내용이 『초오센시』에 있다고 한 것은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일반적 견해를 투사한 錯視 내지 ‘읽어넣기’로 보인다”고 ‘발명’과 ‘기원’의 강박을 따졌다.

윤 교수의 논의를 수용한 황종연 교수의 글 역시 작심한 김 교수에겐 혐의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황 교수는 당대의 일급 문사였던 문일평의 신라통일 요인론이 ‘일본인이 발견한 신라로부터’ 나왔으며, 이 ‘일본인이 구축한 신라라는 상상계’를 조선의 문화적 자원으로 전유하는 것은 1930년대 조선의 지적·예술적 작업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하야시의 『초오센시』의 신라통일 요인론을 면밀하게 재독함으로써 반론의 여지를 만들어냈다. 하야시의 제법 조리있는 이 역사론이 사실은 “그의 학식에서 생성된 논술이 아니라 『동국통감』(1484)의 3개 史論에서 발췌한 네 토막과 『삼국사기』의 한 구절을 짜깁기한 것”임을 밝히면서, 문일평의 신라통일-인화론은 “『삼국사기』를 주로 참고하고, 『동국통감』등의 사론을 참조해 이뤄진 것”임을 특정했다.

역사 중층성을 둘러싼 새로운 해석 논쟁 기대


김 교수의 문제의식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은 어쩌면 바로 이 대목일 것이다. 그는 “황종연이 동료 역사학자와 함께 아무 의심 없이 하야시 발명론으로 기울게 된 요인”을 추적, ‘근대와 근대주의를 특권화하는 방법론적 유혹’ 때문이 아니겠냐고 몰아붙였다. “역사연구에서 전근대의 유산과 기억이라는 요인은 하찮게 여기면서 근대의 발명·변혁을 강조하고, 근대라는 시공간에서는 식민주의 헤게모니를 역사적 운동의 제1원인으로 가정하는 논법이 심각하게 우려”된다고 김 교수가 말했을 때, 정년을 앞둔 그를 닦달한 것은 “경박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발명’이라는 술어”에 배어 있는 ‘편향’이었다. 그가 불편해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말은 역사의 다선적 얽힘과 중층성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한다. 그리고 발명 이후의 국면을 그 앞시기에 대해 특권화하고, 발명의 권력/주체를 여타 행위자들에 대해 특권화”하기 때문이다. 그가 두아라(P.Duarra)와 차크라바르티(D.Chakrabarty)를 인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선태·황종연 교수의 『신라의 발견』을 놓고 김흥규 교수가 제기한 비판은 또다시 역사 중층성의 해석 문제, 식민지인의 정체성 등을 둘러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방향성에 관한 좀더 정치한 질문을 던졌다. 윤선태·황종연 교수의 대답이 궁금하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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