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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미완의 로마사
[학이사] 미완의 로마사
  • 박설호 교수
  • 승인 2002.03.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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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18 18:36:43
몇년 전 아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왜 자주 거짓말하니?”, “…”, “양치는 소년과 늑대에 관한 이야기 알지?”, “응” “그런데도 거짓말할래?”, “시시콜콜 대답하기 싫어서…”, “그럼 침묵하면 되지 않니?” 나는 아들에게 침묵의 권한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귀중한 무기가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세상은 때로는 우리에게서 묵비권을 빼앗아간다. 한계 상황을 생각해 보라. 총칼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저항 행위이지만, 위험하지 않는가?

며칠 전 신문에 친일 행각을 저지른 자의 명단이 일제히 공개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제 저 세상 사람들이다. 역사는 공정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일까?

일순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1817~1903)이 뇌리에 떠올랐다. 오랫동안 서양의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작용한 그의 대작, ‘로마사’. 1902년에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학자, 테오도르 몸젠. 그는 프로이센 학술원으로부터 오랫동안 거액의 연구비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16명이나 되는 자녀를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었으며, 베를린 마흐街 8번지, 수만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대표작 ‘로마사’는 미완성 작품이다. 제 4권은 빠져 있다. 왜 몸젠은 로마의 마지막 역사를 완성하지 않았을까. 그가 남긴 편지들은 이에 대한 대답을 암시해준다. 프로이센 학술원은 국가의 합법성과 당위성을 몸젠에게 은근히 요구했다. 프로이센과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유사하게 기술하는 작업이 그 요구 사항이었다. 그러나 몸젠은 다른 역사가들처럼 차마 “네로의 치하에서 로마인들은 평화롭게 살았다”고 기술할 수 없었다. 그는 권력에 빌붙어, 거짓 충성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몸젠은 학문적인 우를 범하기도 했다. 가령 독재자 카이사르를 과대 평가하고, 폼페이우스라든가 키케로 등을 비난하는 등 말이다. 그러나 그는 학자로서의 양심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완성되지 않은 로마사 제 4권은 어느 학자의 품위로운 침묵을 상징하고 있다.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영혼을 다 바쳐 ‘에네이아스’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서사시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의 유언은 원고를 불태우라는 것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영웅 에네이아스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비유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싶었다.

이에 비하면 독재에 빌붙어 이득을 챙기는 학자도 있다. 가령 하이데거를 생각해 보라. 그는 자발적으로 나치 당원이 되었다. 1933년 당시에 독일의 대학들은 민족 혁명을 지지하고, 유태인의 학설을 파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역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와중에서 하이데거는 대학 총장이 되었는데, ‘독일 대학의 자기 확인’이라는 강연을 행했다. 그는 “오로지 지도자 (히틀러를 가리킴)만이 독일의 실체이고, 현재이자, 미래이며, 법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거창한 이야기이지만, 학문의 본질은 인문 사회과학의 경우 통용되는 가치관의 모순을 추적하고, 나아가 어떤 가능한 해결 방안 등을 제시하는 데 있다. 만약 지식인이 통용되는 가치관에 결탁하고, 이를 방조하는 기득권을 옹호한다면, 그는 학자로서의 ‘비판’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셈이다.

며칠 전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과거 사람들의 친일 행각은 역사의 장에서 밝혀져야 해. 죄를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그러자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쨌든 나는 가난, 책, 학자 등 모두를 좋아하지 않아. 일본의 대중 음악이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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