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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환경’·‘질병계’ 개념, 진화론의 시각을 넓히다
‘내부환경’·‘질병계’ 개념, 진화론의 시각을 넓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07.14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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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와 그르멕에서 찾은 진화의학의 가능성

현대 진화의학이 ‘내부환경’와 ‘질병계’라는 두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희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과학철학)는 지난 2일 과천과학원에서 열린 다윈탄생 200주년 기념 연합학술대회에서 「프랑스 의학사에서의 ‘적응’ 개념: 진화론적·생리학적·생태학적 이해」를 발표하면서 클로드 베르나르(1813~1878)과 미르코 그르멕(1924~2000)이 수립한 개념들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다윈이 사용한 ‘적응(adaptation)’개념은 프랑스 의학사에서 진화론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이해돼 왔다. 베르나르는 생리학적 의미의 ‘적응’ 개념에 기초해 ‘내부환경(milieu interieur)’ 개념을, 그르멕은 ‘질병계(pathpcenose)’개념을 제안하며 ‘적응’개념을 생태학적 의미로 이해했다.


한희진 교수에 따르면, 베르나르는 실험의학 이념에 입각해 유기체의 고유한 ‘내부환경’을 유기체와 광물에 대해 공통적인 ‘외부환경’으로부터 구별했다. 베르나르는 간의 글리코겐 합성 기능을 발견하고, 이 기능에 의해 혈당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러한 실험결과에서 그는 유기체가 외부환경의 교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이때 각 장기의 상이한 기능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은 물리화학적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안정화를 추구하는 유기체의 생리적 경향과 상태가 바로 내부환경이다. 바로 여기서 유기체가 외부환경뿐만 아니라 내부환경의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적응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유기체, 내부환경 변화에 능동적 적응
미르코 그르멕은 1969년에 현대 생태학의 ‘생물계’ 개념을 모델로 ‘질병계’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제안했다. 한 교수는 이 개념을 두고 “특정한 역사적 시대에서 질병들의 공시적 관계와 통시적 변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연구를 돕기 위해 수립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그루멕이 질병계 개념을 수립하는 데 가장 많이 활용한 사례는 흑사병과 나병이다. 그는 이 두 유행병이 예방법이나 치료법이 완성되기 전에 왜 서구에서 사라졌는지 의문을 던지면서, 전염병의 ‘자연적 소멸’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가설을 제시한 뒤 자신만의 설명가설을 발전시켰다. 한 개인이나 개체군에 국한해서 질병들의 길항작용을 전제하지 않고, 질병의 관점에서 다양한 질병들의 상호작용을 가정한 것이다. 그르멕은 이 연구로부터 서양에서 나병의 소멸이 15세기 사회적·정치적·인구학적 변화에 기인한 결핵의 증가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하나의 질병계에 속해 있는 서로 다른 질병들이 자연선택의 압력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현상을 읽어낸 셈이다.

“15세기 결핵 증가로 나병 소멸했다”
그렇다면 이 두 개념은 현대 진화의학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한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진화의학에 관심을 갖고 진화의학을 위해 새로운 개념과 가설을 제안하는 것은 여전히 의학을 실천하지 않는 고고학자, 인류학자, 진화생물학자”라고 말하면서 “진화의학을 임상 조건에서 검증하는 연구는 많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임상실험이 뒤따라야 하는 ‘의학’의 전통에 통합 가능한 베르나르와 그르멕의 두 개념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한 교수의 착안점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가 “생명과학의 여러 수준에서 발견되는 공진화는 다위 진화론과 무관해보이는 베르나르와 그르멕의 개념들과 일정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는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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