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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서로다른 시선 … 통찰력의 기원 또는 인간에 대한 예의
두 개의 서로다른 시선 … 통찰력의 기원 또는 인간에 대한 예의
  • 홍지석 객원기자
  • 승인 2009.07.06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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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밖 미술비평_ <7>박정자와 박홍규

미술작품을 그저 미적 관조, 또는 快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문학적 사실로 간주해 그로부터 시대정신, 패러다임 또는 이데올로기의 양상 및 변천을 읽어보려는 시도는 미술사, 철학을 위시한 인문사회과학 전반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한편으로 미술작품을 보다 풍부하게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삶과 문화에 대한 보다 심화된 해석에 기여해 온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접근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들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미술작품에 다가서려면 분석가 또는 해석가는 부지런하여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지적했듯 시대와 현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력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문학자 박정자와 법학자 박홍규가 미술작품에 관해 쓴 글들은 이러한 통찰력과 직관력의 의미와 의의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노작들이다.    

바타이유를 따라 체험하는 황홀한 법열


    먼저 박정자의 경우를 보자. 박정자는 우선 푸코와 더불어 시선과 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뒤이어 이런 관심을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넓힌 경우다. 이러한 궤적을 잘 보여주는 저서가 바로 근래 출간된 두 권의 저서, 곧 『시선은 권력이다』(기파랑, 2008)와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조각: 푸코, 바타이유, 프리드의 마네론 읽기』(기파랑, 2009)이다. 『시선은 권력이다』의 서문에서 박정자는 자신이 1979년 푸코의 『성의 역사』 제 1권 ‘앎에의 의지’를 『성은 억압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하면서 권력과 시선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노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언제는 번역으로, 언제는 논문으로, 단편적이고 참조적인 글을 쓰면서” 갖게 된 “시선과 권력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욕망”의 소산이다. 이렇듯 오랜 욕망의 산물인 『시선은 권력이다』는 시선과 권력에 대한 푸코의 담론을 읽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시선의 문제는 결국 인정투쟁, 곧 “사람과 사람의 힘겨루기 내지는 권력게임의 문제”이며 현대 철학에서 시선의 문제가 갈수록 부각되는 것은 “기술문명이 발전하고 인류가 진보하면 할수록 나를 몰래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커지기 때문”이라는 이 책의 결말은 읽은 이로 하여금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마네 그림에서…』는 또 어떤가. 이 책은 부제가 말해주듯 푸코, 바타이유, 프리드, (그리고 그린버그)의 마네론에 대한 진지한 독해다. 이 책에서 박정자는 열거한 논자들을 따라 마네 그림에서 서사와 환영, 그리고 (선)원근법이 붕괴되고, 있는 그대로의 그림, 즉 화면 속에 깊이라고는 없는 캔버스의 평평한 평면이 드러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박정자는 바타이유를 따라 합리적 이론이나 앎으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닌 그냥 뭔지 알 수 없는 황홀한 법열의 순간을 체험한다. 이러한 독해 과정에서 박정자는 특히 마네 그림에서 나타나는 원근법의 붕괴에 주목한다. 그녀에 따르면 세상은 원근법이 표상하는 바 “그렇게 부동의 자세로 꼼짝않고 얼어붙어 있는 대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근대철학이 과학적 원리들을 동원해 대상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던 주체의 자리는 작위적이고 허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네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담론에서 대두된 ‘주체에 대한 회의’를 선취한 선구적 작가로 평가될 수 있다.

   이렇듯 박정자는 푸코, 바타이유 같은 철학자들이 시각과 미술을 보는 관점을 훌륭히 그리고 친절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박정자 자신의 보다 적극적인 독해가 없는 것은 아쉽다. 저자 나름의 분석,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분석은 어디까지나 푸코, 바타이유가 그어놓은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극성은 때로 이들 서구 작가나 사상가들의 입장과 지나치게 가까워져 다음과 같은 아슬아슬한 발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원근법의 부정, 農談이나 그라데이션 없는 투명하고 순수한 색채의 사용, 프레임에서 잘리는 주제 등 마네가 시도한 새로운 기법들은 모두 일본의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미 100년 전에 일본이 서구인들의 의식을 강렬하게 사로잡고 그들의 사유방식까지도 바꿔놓았다는 사실이 부럽고 아프게만 느껴진다. 그 시대에 우리는 아직 중국의 신선과 산하만을 그리고 있었고 동시대의 풍속을 그린 풍속화들이 있기는 해도 양적으로 빈약하고, 스케일이나 화려함에 있어서 일본의 그림과 비교할 수 없이 열세였다.” (『마네 그림에서…』, 23쪽) 
                                 

   이제 박홍규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박홍규는 법학자이지만 자기 고유 영역 바깥(?)에서 푸코의 『감시와 처벌』,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같은 굵직한 번역서를 세상에 내놓았으며, 미술과 관련된 번역서나 저서 역시 오랜 기간 다수 발표해온 저자다. 그 가운데 공예가이자 건축가, 디자이너, 정치가였던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개마고원, 1998), 『윌리엄 모리스 평전』(개마고원, 2007),  『내 친구 빈센트』(소나무, 1999),  『오노레 도미에-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소나무, 2000), 그리고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소나무, 2002),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아트북스, 2005), 『구스타프 클림트, 정적의 조화』(가산, 2009)등이 두루 포함돼 있다. 또 『시대와 미술』(영남대학교출판부, 1997), 『예술, 정치와 만나다』(이다미디어, 2007)과 같이 시대나 정치 같은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미술을 조명한 저서들도 있다.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주관적 해석의 무게
   웬만한 미술전문가를 압도하는 박홍규의 미술에 대한 여러 저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관점은 ‘삶의 본질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에 다다르기 위한 예술가들의 사투, 곧 인간해방을 위한 노력들에 대한 애정이다. 이러한 애정은 그러한 해방을 방해하고 거부하며 저주하는 것들에 대한 예술가들의 반항에 대한 지지와 연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의 미술에 대한 글쓰기는 항상 양식이나 작품보다는 작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특히 그가 애정을 갖는 작가들은 모리스나 반 고흐, 도미에, 고야, 클림트 같이 비속한 것들에 맞서 설령 실패하더라도  자유로움을 향해 날개짓 했던 작가들이다. 예컨대 그는 산업혁명기 대량생산이 낳은 비인간적인 현실을 비판하면서 예술의 민주화와 사회주의를 역설한 모리스를 따라 다음과 같이 외친다.  “모든 인간이 본래 가졌던 인간성이 깃든 제품을 ‘만드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미술과 공예는 그러한 인간성의 해방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윌리엄 모리스 평전』, 309쪽)

   이러한 시각은 가령 부르주아의 호사 취미에 영합해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작품을 제작한 화가로 평가받던 클림트에 대한 재해석에서 빛을 발한다. 그것은 자신의 예술이 ‘그 시대의 정신을 표현한 가장 참된 예술’이라고 믿었던 클림트의 신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이렇게 클림트의 작품,  「키스」를 다시 보면 우리는 실제로 관능적이라고 볼 요소를 별로 찾을 수 없다. “「키스」의 두 연인만이 아니라 클림트의 여러 그림에 등장하고 클림트 자신이 그 연인과 함께 속옷없이 걸친 푸른 통짜옷은 그 시대에 대한 ‘반항의 옷’이었다. 이는 신체 부위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속옷으로 몸을 죄는 당시 유행한 귀족과 부르주아의 에로티시즘 패션을 부정하고 몸을 통한 인간해방을 상징한 것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화면을 덮는 황금색도 고대 비잔틴 종교화에 사용된 것으로 그것을 배척한 교조적인 세속 전통화에 대한 반발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255쪽)

   그러니까 박홍규는 ‘노동의 즐거움, 창조의 즐거움, 삶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사회를 꿈꾸는 유토피언이다. 이 유토피아주의자가 꿈꾸는 세계는 특권 정치와 재벌 경제 하의 추악한 자본주의의 정 반대편에 서있다. 그 세계를 그는 예술가들과 더불어 꿈꾼다. 이를 위해 그는 예술의 과제가 “가능한 한 민중이 각자의 독자적인 이의제기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예술, 정치를 말하다』, 290쪽)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쯤해서 박홍규의 해석은 상당히 주관성을 띤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성, 그러니까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주관성은 더 나은 해석을 위한 통찰력과 직관력만큼이나 미술에 대한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이 아닐까. 존 버거가 쓴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아트북스, 2003)의 역자 해설에서 박홍규는 이렇게 말한다. “버거의 모든 책에 등장하는 근본적인 주제는 ‘보는 것’이다. 버거는 그림이나 사진 앞에 서서 자신이 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과 싸운다. (…) 그는 충분히 오랫동안 보면 어두운 그림자를 뚫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즉 ‘모든 바라봄 속에는 의미에 대한 기대가 숨어있다.’” (346쪽)

홍지석 객원기자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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