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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참전, 진짜 문제는 ‘국제 규범 위협’이다
미국의 이라크 참전, 진짜 문제는 ‘국제 규범 위협’이다
  • 김원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철학
  • 승인 2009.07.0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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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서구』위르겐 하버마스 저 | 장은주·하주영 옮김 | 나남 | 2009 | 288쪽

『분열된 서구』위르겐 하버마스 저 | 장은주·하주영 옮김 | 나남 | 2009 | 288쪽

책 머리에
“서구가 분열하게 된 것은 국제 테러주의의 위험 때문이 아니라 국제법을 무시하고, 유엔을 주변화하고 유럽과의 불가피한 단절을 받아들인 현 미국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국가간의 자연상태를 종식시키려는 칸트적 프로젝트가 위험에 처해 있다. 서구의 분열은 표면적인 정치적 목표가 아니라 인류를 문명화하려는 위대한 노력들 중 하나와 관련해서 일어나고 있다. 표제로 사용된 이 책의 마지막 논문은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물론 분열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 자체를 관통하여 일어나고 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주로, 전 생애에 걸쳐 미국의 최선의 전통- 1800년대의 정치적 계몽의 뿌리, 실용주의의 풍성한 조류 및 1945년 후에 회귀한 국제주의-에 일체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이런 전통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태도가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작용한다. 아데나워 이래로 독일 연방공화국의 서구지향성으로 인해 형성되었던 화학적 결합은 이제 두 가지 구성요소로 분리된다. 즉, 서구문화의 원칙과 기본 신념에 대한 지적이고 도덕적인 결속-궁극적으로 자유주의화 된 독일의 규범적 자기이해는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은 냉전 시기에 유럽을 핵우산의 보호 아래 있게 했던 패권적 강대국에 대한 독일의 기회주의적 순응과 분명히 분리된다.
나는 이런 차이 또한 상기시키고 싶다. 국제법의 입헌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나는 이런 문제와 유럽 통합이라는 목표의 연관을 조명하고 있는 전에 발표된 몇 가지 글을 함께 엮을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슈타른베르크, 2004년 1월 위르겐 하버마스


『분열된 서구』는 2001년 9.11 테러와 2003년 이라크 전 발발을 배경으로 수행된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정치철학적 현실 개입 시도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9·11 이후 발표된 하버마스의 인터뷰, 기고문들과 더불어 전체 글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작성된 논문 ‘국제법의 입헌화는 아직 기회가 있는가?’를 결론 글로 싣고 있다. 9·11 테러, 이라크 전, 유럽통합, UN 개혁과 새로운 세계질서의 모색 등 이 책은 매우 폭넓고 현실적인 정치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美 일방주의 외교노선과 ‘칸트적 기획’
    이러한 폭넓은 주제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이 책의 제목인 ‘서구의 분열’과 그러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 즉 ‘국제법의 입헌화’라는 칸트적 기획을 제시하는 데 있다. 여기서 분열이란 미래의 전 지구적 정치질서의 방향과 목표를 규정하는 데서 나타난 분열을 의미한다. 네오콘의 일방주의 외교 노선에 입각해 국제법을 무시하면서 시작된 美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서구는 앵글로색슨 국가들과 유럽대륙 국가들로, 낡은 유럽과 새로운 유럽으로 분열됐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분열의 근본적인 책임은 국제법을 무시한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 노선에 있다.

    미국의 이라크전은 첫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입각한 전쟁이 아니며, 둘째, 실제적이거나 긴급한 공격에 대한 자기방어 전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제법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힘에 의한 일방주의 외교 노선을 강화했으며, 이라크 민중의 해방과 중동 민주화를 기치로 이라크 전을 수행했다. 엄청난 힘의 불균형 속에서 전쟁은 신속히 종료됐고, 독재자 후세인은 결국 체포됐다. 세계시민들은 독재자 후세인의 銅像이 무너지는 영상에 환호하는 동시에 강대국의 일방적인 힘의 행사에 대해 반대했다.

    하버마스가 이라크 전에 반대하는 핵심적인 논점은 그것이 국제법이라는 규범을 파괴했다는 데 있다. 그는 반미주의자들처럼 미국이 본질상 제국주의 국가라든가 미국이 전쟁을 수행한 목적 자체가 자국 이익의 극대화에 있다는 식의 혐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미국의 이라크 전이 그 절차상 결코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는 결국 국제규범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전이 자유와 인권의 신장, 중동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확대라는 목표 하에서 수행됐고, 나아가서 그 전쟁이 결과적으로 이라크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신장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전쟁은 결코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차이는 인권 존중과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이념과 목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서 드러난다. 

     하버마스의 주장 근저에는 진정한 세계평화는 강대국의 선의가 아니라 ‘국제법의 입헌화’ 기획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판단이 놓여 있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국가 내부의 진정한 평화는 강자의 선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등한 상호인정의 규범에 기초한 민주적인 법의 지배가 관철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세계평화 역시 현재 국제사회에서 헌법과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국제법이 그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갖출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국제법이 국민국가의 헌법과 같은 실질적 효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며, 이런 의미에서 ‘국제법의 입헌화’는 우리에게 하나의 과제로 주어져 있는 상황이다. 민주적 국가들 사이의 법적 평화라는 이념을 위해 그가 제시하는 방안은 UN을 개혁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다국적 차원의 국제기구들을 활성화 하는 것이다. 개혁되고 강화된 UN은 세계평화와 인권 수호라는 제한적 임무만을 수행하며, 기타의 지역적, 지구적 사안들은 국제사회 강대국들 사이의 협력에 기초한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담당해야 한다. 이러한  구상을 그는 ‘세계정부 없는 세계 내정’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이상적인 세계공화국이 없이도 법에 의거한 평화로운 국제질서가 가능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자발적 협력이 필요하며, 유럽연합은 이러한 협력을 유도하는 국제사회의 주요한 대안적 행위자가 돼야만 한다. 하버마스는 유럽연합이 지구화가 초래한 탈국민국가적 상황 속에서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지역통합의 모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통합된 유럽이 초강대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유력한 지역통합의 시도들이 세계의 각 지역 단위에서도 진행돼야만 하며, 이러한 지역 통합체들 간의 협력에 기초해서 지구화의 도전에 대한 효과적 대응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구상에 기초해 미국이 국제법을 존중하고 다자주의를 중시하는 전통적 외교 노선으로 귀환해, 국제법의 입헌화 기획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동북아에 던지는 함의
    지구화가 초래한 탈국민국가적 상황은 오늘날 인류에게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선 정의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은 도덕으로 재무장한 현실주의나 시장의 자율적 힘에 의거한 세계질서를 거부하면서 과연 어떤 규범적 이상을 기초로 평화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될 수 있을지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어판의 보론으로 실린 역자의 논문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우리들에게 이라크 문제는 북한 문제와 겹쳐지고, 유럽통합에 대한 논의는 동북아의 현실과 겹쳐진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 중반 300만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폭압적인 정치행태가 유지되고 있다.

    현실은 이미 충분히 비극적이다. 그러나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북한 내부 사정과 강대국들 사이의 상이한 이해관계로 인해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민족주의가 팽배한 동북아에서는 여전히 중국과 일본이 지역 패권을 다투는 상황 속에서 지역통합 논의는 아직 본격화 되지 못하고 있다. 

    무너지는 독재자 후세인의 동상은 당위와 능력, 법과 권력 사이의 현실적 간극을 우리에게 증언했다. 자신의 선의를 확신하는 일방적인 힘의 행사는 정당한 규범이 현실적 효력을 상실할 때 비로소 등장한다.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서 정의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해야 하는 새로운 인류사적 과제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지연된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무기력한 규범과 현실의 힘이충돌하는 비극적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지혜가 아닐까. 통일국가를 건설하면서 이 과정 속에서 동북아의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국제법의 입헌화’라는 하버마스의 기획은 이러한 우리의 상황을 고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규범적 방향을 제시하고 것으로 보인다. 

김원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철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근대성의 역설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전개」,『하버마스와 현대사회』등의 논저가 있다. INSS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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