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4-03 15:58:59
윤 교수는 책의 이름을 '한국정치체계'라고 했다. '체계'라는 말은 단순히 체계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론적 기반을 가진 개념이었다. 그것이 처음 사용되기는 50년대 중반으로 일반체계이론(General Systems Theory)에서 유래된다.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 학자들의 공동연구결과로 나온 이 개념은 공학(후에는 컴퓨터에도 적용)만 아니라 의학, 그리고 사회과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개념이었다. 마치 쿤(Kuhn)의 과학혁명론이 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듯이 일반이론도 학문분야에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열어준 이론적 시각이었다.
그것을 정치학에 도입한 것은 당시 시카고대학에 있었든 이스튼(David Easton)교수였다. 그의 저서 『Political System』(1958)이 나왔을 때 그 책에 대한 반응이 대단했다. 정치현상을 "가치의 권위적인 분배"라고 정의한 이스튼의 발상이 매우 새로웠고 기존의 "정치는 곧 권력현상"이라는 생각을 도전했을 뿐 아니라 가치의 권위적인 분배를 둘러싼 모든 활동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것과 정부라는 공시적 기구를 중시하기 보다 그것과 그 밖의 여러 집단이나 세력들이 하나의 거대한 체계(system)를 이루어 움직이는 것으로 인식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대 정치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윤 교수는 그 즈음 하바드 대학의 옌찐연구비를 얻어 교환교수로 일년간 연구생활을 하는 동안에 체계이론을 포함한 미국정치학의 여러 가지 이론과 서적에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 윤 교수가 받은 그러한 영향이 그의 귀국 후 한국정치체계의 출간으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내용의 중점이 되는 하나는 주로 4·19 학생혁명 이후에 쓴 글들로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이미 그 때 윤 교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해‘권위주의 정권’또는 체제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아도르노(Adorno)의 권위주의적 개성에 대한 연구내용을 많이 인용하면서 자유당 정권만 아니라 한국정치문화자체가 얼마나 권위주의적인가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것으로 한국에서 권위주의정권이 처음 등장한 시기를 1952년 부산에서 있었든 정치파동 때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투표행태에 대한 윤 교수의 개척자적인 연구결과를 다룬 논문이다. 윤 교수는 4·19 직후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상주읍민들을 대상으로 투표행태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하여 얻은 자료를 분석한 [읍민의 정치행태에 대한 연구"]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정치행태(political behavior)라는 말을 처음 도입하신 분도 윤 교수이지만 준봉(遵奉)투표행태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분도 바로 윤 교수였다.
윤 천주 교수는 60년대 초 한국의 정치학계에서 이처럼 의욕적이고 진지한 자세와 이론적인 안목에서 당시 미국 정치학계의 연구방법과 동향을 파악하여 그것을 선택적으로 한국의 정치현상을 보다 현실적이며 학문적으로 구명하는데 활용하려했다. 총장 재직 중에는 선거행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얻은 자료를 가지고 『한국의 선거 행태 연구』를 출간하기도 했으며 은퇴 이후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정치학회주관 세미나에서는 언제나 청중석에서 윤 교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윤천주(1921-2001)
윤천주 선생은 1921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대(東京大) 정치학과를 거쳐 1947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 교수가 됐다. 1950년대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로 있으면서 체계 이론을 국내에 도입했으며 박정희 정권 시절 정계에 입문, 1971년까지 문교부 장관, 전국구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이후 부산대 총장, 서울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선거행태에 관한 연구 기반을 닦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국 정치체계 서설』(1960), 『한국 정치체계-단극적(單極的) 통치형』(1960), 『우리나라의 선거실태』(1981), 『참여선거와 정치발전』(1986)등이 있다.
한배호 /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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