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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家를 만드는 內功 … 독일 철학계가 보여준 논쟁의 열기
大家를 만드는 內功 … 독일 철학계가 보여준 논쟁의 열기
  • 이충진 한성대·철학
  • 승인 2009.06.2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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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마인츠대 ‘저서 심포지엄’ 참관기

1797년 독일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근거들』이란 긴 제목의 텍스트가 발간됐다. 저자인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당시 73살이었다. 오늘날 칸트 연구자들은 1797년의 텍스트를 『법이론(Rechtslehre)』이라고 줄여 부른다.

『법이론』은 독특한 운명을 갖고 있는 텍스트였다. 발간 후 1년 만에 2쇄가 나올 정도로 동시대인들에게 환영받았지만 사실 이 텍스트는 적지 않은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 텍스트의 많은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사유과정을 뒤 쫒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저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동시대인들은 1797년의 텍스트에서 不具의 모습을 보았지만, 정작 저자 자신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독일 마인츠대에서 열린 ‘저서-심포지엄’의 한 장면. 이 심포지엄에서 논쟁의 도마에 오른 이가 바로 브란트 교수였다.

150년이 지난 후 어느 칸트 연구자가 “현존하는 텍스트는 저자의 생각을 올바로 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칸트의 원고가 인쇄 과정에서 훼손됐을 가능성을 공론화시켰다. 20년 후 다른 칸트 연구자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를 내놓았으며, 그 이후 170여 쪽 분량의 텍스트에서 4~5 쪽 정도가 ‘사실 상’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돋보기로 읽는 ‘칸트’ 텍스트, 이렇게까지 고증할까?
그로부터 다시 한 세대가 지났다. 1986년 펠릭스 마이너 출판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의 『법이론』을 출판했다. 편집을 책임진 사람은 루드비히(B. Ludwig)라는 젊은 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선배들과는 달리 텍스트 훼손이 몇 단락에서만이 아니라 텍스트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했다고 믿었다. 1986년의 텍스트를 만들면서 그는 이전 텍스트에서 10 여 쪽 이상을 삭제했으며 수 십 쪽에 달하는 부분에서 문단의 순서를 다시 배열했다. 이와 같은 ‘거대한 개입’을 위해 그는 한편으로 200년 전 관련 자료를 모두 조사했으며 다른 한 편 1797년 전후 1~2년 사이에 작성된 칸트 텍스트를 하나하나 분석했다. ‘그러므로’, ‘따라서’, ‘왜냐하면’ 등과 같이 논의맥락을 확인할 수 있는 표현들, 쉼표와 마침표의 위치, 문장과 문단의 길이 등이 분석의 대상이었다.

2009년 5월 독일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인 볼펜뷰텔(Wolfenbuettel)에서 칸트 연구자들의 소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계기는 칸트 텍스트의 러시아어 번역작업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목표는 『법이론』의 철학적-문헌학적 검토였다. 자연히 1986년의 텍스트가 논의의 주된 대상이었고 루드비히가 비판의 주된 목표였다. 이를 위해 독일, 러시아, 미국 등에서 온 14명의 철학자들은 5일 동안 같은 곳에서 먹고 자며 매일 8시간 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첫 째 날 볼프(M. Wolff) 교수의 비판은 강력하고도 새로운 것이었다. 루드비히는 국가법 논의에 관한 단락들의 순서를 변경했었다. 대략 12쪽 정도 분량의 텍스트였다.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볼프 교수는 20쪽이 훨씬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났다. “나는 우리의 동료인 루드비히 교수가 아무런 근거 없이 행했던 이러한 텍스트 변경을 다음 기회에 반드시 수정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루드비히 교수의 반론이 이어졌고 그에 대한 볼프 교수의 재반론이 다시 제기됐다. 하루 종일 비슷한 모습의 토론이 진행됐다. 모임이 끝난 후 루드비히 교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지난 23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일인 걸요.”

진리의 발견을 위해 벽면수행을 하거나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들어가는 것은 동양 문화권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아마도 동양의 철학자들에게 텍스트는 진리 발견의 필수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서양 철학이 처음 시작될 때에도 철학자들 손에 텍스트가 들려 있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날 텍스트 없이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최소한 현대 독일 철학자에겐 그러하다. 텍스트는 철학의 출발점이자 철학의 토대이며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철학자로선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이다. 정확한 텍스트를 확보하기 위한 독일 철학자들의 노력, 그것은 집념의 단계를 넘어 거의 투쟁에 가까워 보였다. 200년 전에 발간된 텍스트에 관하여 2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논의를 지금 이곳에서 다시 이어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독특한 논쟁의 자리


지난 6월 5일 독일 마인츠 대학교에서 ‘저서-심포지엄’(Buch-Symposium)이란 다소 낯 선 이름의 연구모임이 있었다. 독일 칸트학회와 마부르크 칸트아키브에서 후원하는 모임이었다. 모임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비판가의 비판 - 라인하르트 브란트의 저서 『임마누엘 칸트: 무엇이 남았는가?』를 위한 심포지엄.’

브란트 교수는 올해 72세이다. 30년 동안 재직했던 마부르크 대학교에서 7년 전 퇴임했다. 계몽주의 철학, 칸트 철학, 근대 법철학 및 정치철학, 미학 등이 주요 연구 분야이며, 특히 1970년대 법철학 연구는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은퇴 후에도 매년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강연을 위해 남미와 일본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그가 올해 칸트에 관한 연구서를 출판할 예정이다.

그의 저서는 6개 단락으로 구성돼 있었다. 공간이론, 종교철학, 윤리학, 법철학, 역사철학, 계몽주의 등 칸트철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6명의 철학 교수들이 각각의 단락을 맡아서 출판 전에 그 내용을 점검하고 비판하는 자리였다. 발표자들 외에도 기조 강연을 위해 마시모 모리(M. Mori) 교수가 이탈리아에서 왔으며 독일 칸트학회 회장인 되플링어(B. Doerflinger) 교수도 청중으로 참석했다.

50여 명의 철학자들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구성원은 다양했다. 브란트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들 4명, 그 제자들 아래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들 십여 명, 브란트 교수와 오랜 입씨름을 벌였을 것으로 보이는 노년의 신사들, 브란트 책을 읽으며 철학을 배웠던 중년의 사람들, 갓 스물을 넘긴 것 같은 청년들. 독일, 덴마크, 이태리, 브라질, 일본, 한국까지, 그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6개의 발표는 모두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발표자들은 먼저 저자의 입장을 요약 소개한 후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다. 30분 발표와 30분 토론이 오전에 3번 오후에 3번 반복됐다. 발표자들은 예외 없이 브란트의 칸트해석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老철학자는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대부분의 청중은 그들 사이의 논쟁에 끼어들 기회를 가질 수 없었는데, 논쟁의 속도보다는 논쟁의 열기 때문이었다. 발표 전 주인공을 향한 의례적 인사와 토론 후 주인공에 의한 의례적 감사표시가 사뭇 낯설 지경이었다. 그나마 그것을 위해 그들은 몇 십 초 정도의 시간만을 사용했다.

老學者를 향한 젊은 동료들의 비판


17년 전 브란트 교수는 코헨(H. Cohen)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한 적이 있었다. 신칸트학파의 본거지인 마부르크에서 그 학파의 창시자를 기념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독일 전국에서 온 100여 명의 철학자들이 첫 날 기조 강연에 참석했다. 브란트 교수는 그들 앞에서 코헨의 칸트해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들어내 보였다. 선배 철학자를 기념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 자리를 주관한 후배 철학자가 바로 그 선배 철학자의 오류와 한계를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브란트 교수가 50대였던 20년 전의 일이었다. 70의 나이를 넘긴 그는 지금 자신의 제자들과 젊은 동료로부터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참된 철학체계는 오직 하나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의 철학체계를 자신의 작품으로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것은 곧 ‘나의 철학 이전엔 철학이란 것이 존재하지 조차 않았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년의 칸트가 한 말이다. 만일 칸트의 말이 옳다면 동료 철학자에 대한 비판은 철학자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셈이다. 동료의 주장은 곧 나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비판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비판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동료에 대한 비판은 곧 내가 그의 학문적 업적을 유의미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가차 없는 비판이야말로 학자에게 바치는 가장 큰 존경인 셈이다. 브란트 교수는 오늘 이곳에서 학자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벌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이 행복으로 빛났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독일 철학자들이 동료 철학자를 대하는 자세는 진정성으로 가득했다. 수년의 비판은 비판 받는 이의 업적으로 남을 것이고 수 십 년의 비판은 비판된 이론의 위대함을 증시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객관적인 비판만이 한 철학자의 학문적 공과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으며 지속적 비판만이 한 철학자의 이름을 역사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독일 철학자들은 진정한 비판으로 자신들의 동료를 대했으며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철학적 역사를 구축해 나갔다.

올해는 <칸트연구(Kant-Studien)> 발간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96년에 창간호가 나왔으니 햇수로만 따지면 120년쯤 됐지만 발간연도를 기준으로 하면 올해가 100년째이다. 전쟁 등 외적 요인으로 한 동안 발간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이 잡지는 처음부터 ‘칸트 학회의 철학 잡지’라는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본(Bonn)에 있는 ‘칸트학회’는 1904년에 처음 설립됐으니, 학술지가 학회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셈이다.
<칸트연구>는 다른 학술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칸트연구>에는 연구논문들 외에도 칸트철학 연구에 관한 최신 정보들 및 주요 저술의 서평이 항상 큰 비중을 갖고 등장한다. 가령 200여 년 전 작성된  한 두 쪽 짜리의 메모가 소개되기도 하고, 전문 연구가의 저서에 대한 수 십 쪽의 서평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일 년에 한 번 씩 유럽, 북남미, 아시아 등 전세계에서 발표된 연구 성과들의 목록이 ‘칸트 문헌목록’이란 이름으로 발표된다. 칸트학회 설립목적인 ‘칸트철학 연구의 촉진과 확산’ 중에서 <칸트연구>는 후자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듯이 보였다.

현재 <칸트연구>의 편집과 발간을 맡고 있는 곳은 마인츠 대학교 칸트연구소이다. 이 연구소의 활동은 주로 칸트철학의 역사적 맥락 및 현대적 논의 그리고 외국과의 학술 교류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마부르크 칸트연구소의 사업목적은 칸트철학에 관한 주요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일반적으로 접근 가능한 형태’로 제공함으로써 칸트연구가들 사이의 전세계적 교류를 촉진하는 것이다. 트리어에 있는 칸트연구소는 칸트의 계몽주의 사상이라는 특정한 주제의 연구에, 또 지겐의 칸트연구소는 칸트철학의 발전사적 연구에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동일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되 각각의 연구소가 상이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120년 된 학술지 <칸트연구>의 무게

칸트학회란 이를 테면 칸트연구가들로만 구성된 나라(國) 정도가 될 것이며, 칸트연구소들은 국가기관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연구>는 정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쯤 되는 셈이며, 이 잡지를 발간하는 주무부서인 마인츠 칸트연구소는 국정홍보처 쯤 되는 셈이다. 그곳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전임연구원은 루핑(M. Ruffing) 박사인데, 그녀는 수 십 년 째 ‘칸트 문헌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5월의 맑은 햇빛을 받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준비했던 물음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당신들은 표절된 논문을 점검하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차마 그렇게 물어볼 수 없었다. 그것은 ‘국가’의 위엄을 부인하고 ‘국가시민’의 위엄을 부인하는 신성모독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충진 한성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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