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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프랑스 철학도들의 등용문 '아그레가시옹'
[해외통신] 프랑스 철학도들의 등용문 '아그레가시옹'
  • 김유석 / 프랑스 통신원
  • 승인 2002.03.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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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22 14:41:17
올해 26세의 앙트완느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교원자격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다. ‘아그레가시옹’(agragation)이라고 불리는 이 시험은 해마다 4월에서 6월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그는 이 가운데 철학 교원자격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전공서적들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철학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대략 2천여 명. 대부분 고등학교의 철학선생이거나 대학교수 혹은 국립연구소의 연구원들이다. 철학의 경우, 대학에서의 전공을 살려 취업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교원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게 필수적이다. 어찌 보면 한국의 교원임용고시와 비슷한 이 시험은,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프랑스만의 독특한 제도이기도 하다. 우선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전원 고등학교 철학교사 혹은 대학연구원으로 임용된다. 아울러 이 시험은 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직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관문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대학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와 함께 아그레가시옹의 합격이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인들은 아그레가시옹이 교수법 능력과 전공지식을 검증하는 절대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시험은 단순한 취직시험을 넘어 프랑스의 철학계에 입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이 시험은 무척 까다롭고 고통스럽다. 시험은 총 7차에 걸쳐 이루어지며, 1∼3차의 필기시험과 4∼7차에 걸친 구술시험으로 구성된다. 1차 시험에서는 철학 일반의 지식을, 2차에서는 3명의 철학자에 대한 지식을, 3차에서는 특정 주제에 대한 논변 능력을 평가한다. 보통 2, 3차 시험의 주제는 시험 전 해에 공시되는데, 올해 2차 시험 과목은 플라톤, 라이프니츠, 러셀이며, 3차 시험 주제는 ‘정의’(justice)이다. 필기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은 6월에 있는 네 차례의 구술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4차는 전공 외국어시험으로, 수험생은 영어,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역시 시험 전 해에 각 언어로 쓰여진 작품들이 공시되며, 학생은 자신의 전공언어와 관련된 텍스트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5차와 6차 시험은 철학 일반과 논리학, 인식론 등을 중심으로 출제되며, 7차에는 4명의 프랑스철학자들이 출제 대상으로 된다.
구술시험은 보통 대학의 대형강의실에서 열리는데, 재미있는 점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돼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과 심사위원 사이에 있을지 모르는 비리를 막기 위해, 국가에서 치는 모든 종류의 구술 및 실기시험은 일반인 공개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시험은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 앞에서 진행되는데 마치 재판을 방불케 한다. 수험생은 고사장에서 약 1시간 정도 자신이 준비한 것을 발표하고 심사위원들의 공격적인 질문과 비판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방청객들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 있으며, 만일 특정 학생에 대하여 시험이 부드럽게 진행될 경우, 바로 문제제기를 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통과했을 때에야 비로소 수험생은 ‘아그레제’(agr럊? 아그레가시옹 합격자)라는 자격을 얻게 되며, 프랑스의 철학계에 들어설 기회를 갖게 된다.
올해 철학 교원 채용인원은 80명, 응시자는 2천 3백여명이다. 치열한 경쟁과 까다로운 심사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아그레가시옹을, 단순히 평가라는 의미의 ‘시험’(examen)이라 하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경쟁, 즉 ‘콩쿠르’(concours)라고 부른다. 물론 여기에도 비판의 목소리는 있다. 이른바 국가고시라는 특성상, 어느 정도 규격화되고 잘 짜여진 정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험생의 독창적인 해석이나 생각은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다. 사르트르가 첫해 시험에서 재수를 하고 이듬해에 이른바 ‘정답’을 써서 합격했다는 일화는 이 제도의 역설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아무리 천재적인 직관과 사유가 번득이는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시험규칙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인 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볼 때, 아그레가시옹은 순수 학문의 정체성과 전통을 유지하고 재생산해가는 부러운 제도라 할 수 있겠다.
김유석 / 프랑스 통신원·파리 1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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