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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록하라
[이슈] :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록하라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3.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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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18 15:35:00

풍경 1. 출입문이 밖에서 잠긴 섬유 공장. 부연 실밥과 먼지들이 춤을 추는 작업장. 어디서부턴가 타오르기 시작해 섬유다발과 실타래를 먹이 삼아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리는 거대한 불길. 허파를 찌르는 연기와 미친 불꽃이 주는 극도의 공포. 지옥문처럼 굳게 닫힌 철문. 실뭉치처럼 엉켜 절규하다 하나 둘 쓰러지는 여성들.

풍경 2. 출입문이 밖에서 잠긴 건물의 2층. 싸구려 화장품과 담배 연기로 찌든 쪽방. 음습한 쪽방 어느 구석에서 타오르기 시작해 때 전 이불과 눅눅한 벽지를 타고 오르는 불길. 눈과 코를 마비시키며 살갗을 녹여내는 불꽃의 공포. 굳게 닫힌 철문과 하늘보다 높은 창문. 엄마를 부르며 쓰러진 여성들. 타다 남은 일기장.

눈을 감고 가만히 그려보자. 1908년 미국의 섬유공장, 2002년 대한민국의 윤락가. 시대와 장소만 다를 뿐,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은 지옥이 따로 없다. 멀리 가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루 12시간 넘게 노동하다, 갇힌 채 몸을 팔다 불타 죽는 현실이 바로 지옥이다.

공교롭게도 섬유 공장 화재로 숨진 미국 여성 노동자들과, 윤락가에 갇힌 채 불타 죽은 대한민국 여성들은 94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그렇게 만난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10년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이 제창해 만들어졌다. 3월 8일은 1908년 여성 노동자들의 궐기를 기념한, 세계 여성 역사의 상징과도 같다. 세계 여성들은 정치에서는 ‘소외’, 사회적으로는 ‘약자’, 성적으로는 ‘노예’, 노동에서는 ‘객체’로 살아왔다. 1908년 1만 5천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뛰쳐나오기 전까지, 여성에게 역사란 존재하지 않았다. 3월 8일 화재로 숨진 여성들의 추모가 분노로 터져 뉴욕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 노동제와 노동조합 설립, 선거권 주장을 외쳤다. 그 궐기는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현재진행형’이다.

고통의 ‘아프간’을 쓰다듬는 ‘자매애’

94주년을 맞은 세계 여성의 날을 가장 절박하게 받아들인 이들은 분쟁지역의 여성들, 그 중에서도 안으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탄압과 밖으로는 미국의 무차별적인 폭격 아래 시달리는 아프간 여성들이다. “여자들이 폐허에서 생명을 일굴 때 남자들은 전쟁을 일으켜 모든 걸 죽인다”는 아프간 여성의 절규처럼, 지금 세계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아프간 여성들에게 보내는 전 세계 여성들의 ‘자매애’는 뜨거웠다.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등 유엔기구들은 분쟁지역 여성들의 인권이 절박한 문제임을 통감했고, 8일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의 초점을 아프가니스탄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분쟁지역 여성들이 치르고 있는 “과중한 대가”에 맞췄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분쟁의 궁극적인 책임을 진 남성들과, 그들이 움직이는 유엔은 전쟁을 끝내려는 의지가 없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다. 목숨 걸고 투쟁하는 RAWA(아프간여성혁명연합)에 후원금을 보내고 격려 이메일을 보내고 모금운동을 벌이는 여성들로 94주년 세계 여성의 날은 채워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교조 소속 여성교사들이 아프간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여성부는 있지만 여성은 없는 나라

우리나라 여성의 날은 1985년 시작된 ‘한국여성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해 여성의 연대와 평등을 주제로 펼쳐졌던 올해 한국여성대회의 화두는 매매춘 근절과 호주제 폐지. 지난 10일 대학로에서 열린 한국 여성대회는 ‘성매매 방지법 제정·호주제 폐지·보육의 공공성 확보’라는 세 가지 주제를 내걸었다. 지금 우리나라 여성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들이자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필요악’이라는 암묵적 동의 아래 성을 사는 남성들이 있는 한, 성을 팔도록 강요당하는 여성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국민의 80%가 잘못된 인습이라고 동의해도 호주제는 버티고 남아 사회적 편견의 짐을 지운다. 또한 보육의 공공성이라는 사회적 기반 없이 여성의 사회진출, 여성이 자원이 되는 나라는 요원하다.

여성부가 출범했고,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호주제 철폐 논의가 진행중이며, 친양자제 도입 논의도 나왔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유엔개발계획(UNDP)이 ‘경제적, 정치적 참여와 의사결정’ 등 핵심분야 성평등 관계를 살치는 여성권한척도(GEM)에서 우리나라는 64개국 중 61위를 차지했다. 국회의원, 고위공직, 기업 간부 등 3개 분야에 대한 여성점유율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남성임금의 62% 수준이고 그나마 고용 자체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정부투자기관 여성인력의 69%가 임시, 별정직 종사자라는 조사보고는 2002년 현재 우리나라 여성현실을 말해주는 극히 적은 예들이다.

그래서일까. 올 여성의 날에는 유독 여성 노동자들이 모였다. 서울에서는 여성노동조합들이 모여 주최한 ‘여성노동자 100년사’ 사진전이 펼쳐져 오가는 이들의 걸음을 붙들었다. 회사와 한패가 된 남성노동자들이 뿌린 ‘분뇨’를 뒤집어쓴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불법 폐업으로 문닫은 공장을 지키는 신발 공장 노동자 등, 산업화의 역군으로 떠밀려 국가경제의 기반을 일구면서도 ‘공순이’라는 멸시 어린 이름을 짊어져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가 사진으로 펼쳐졌다. 여성대회에 앞서 7일 국회 앞에서 ‘한국여성노동자대회’가 열려 여성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문제, 임금차별과 허울뿐인 모성보호법을 성토했지만, 대선과 총선에 벌써부터 여념 없는 국회에서는 자그마한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았다는 소식이다.

결국 문제는 여성의 삶이다. 대학민국 여성의 날이 평화와 평등의 소식들로 가득찰 날은 언제쯤 올 것인가.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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