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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性과 건축-예식장과 러브호텔
[문화비평] : 性과 건축-예식장과 러브호텔
  • 양상현 순천향대
  • 승인 2002.03.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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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18 15:14:29

양상현/순천향대 건축학

사람들은 누구나 성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다들 적극적인 성의 향유자가 되고 싶어한다고나 할까. 자본주의 아래서 성적 욕망의 소비구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성의 상품화로 귀결됐고, 왜곡된 성문화는 건축물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표현된다. 가족으로 제도화된 성의 ‘합법적’ 소비가 예식장에서 결혼 행진곡과 함께 출발한다면, 그 ‘불법적’ 유통의 상당부분은 이른바 ‘러브호텔’에서 이루어진다.

역설적이게도 이 두 개의 건축물, 제도화된 성적 결합의 출발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장소인 예식장과 성적 욕망의 은밀한 소비가 이루어지는 러브호텔의 외관은 이상하리 만치 닮아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동화적 상상력에 기반한 중세 유럽의 성이나 궁전의 이미지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문화적 감성은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으로 대표되는 동화적 이미지들에 의해 어릴 적부터 훈련되어 유럽의 성들을 환상과 신비가 가득 차 있는 낭만적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성채들은 외지인에게는 완강하게 닫혀진 채, 특정하게 선택된 인간들에게만 거주가 허용된 공간으로,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은 쾌락과 풍요로 가득 찬 생활-왕, 왕비이거나 혹은 왕자와 공주쯤의-이 보장된 반면, 성밖의 세계는 떠돌이 기사와 마녀들의 비속하고도 침울한 장소인 것이다. 성곽을 둘러 싼 치열한 전투 끝에 용감한 왕자가 사악한 용을 물리치고 성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 아름다운 공주와 키스하는 장면은 어릴 때부터 우리들 머리 속에 각인된 짜릿한 사랑의 원형이다.

식장과 러브호텔은 그 겉모습에 이같은 중세 유럽 성채의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대중의 동화적 감성을 자극하고, 이 약속의 성채 안에서 향유되는 사랑이 낭만과 환상으로 가득 찬 것임을 애써 설파하려 한다. 이에 따라 예식장과 러브호텔은 자꾸만 순정 만화 풍이 되어간다. 낡은 예식장과 여관들은 다투어 궁전이나 성채의 모습으로 외형을 바꾸어 내고 있다. 밋밋한 평지붕 위에 구근 모양의 돔이 올라가고 건물의 모서리에는 뾰족탑이 세워진다. 내부 공간과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 그야말로 허구적 장식일 따름이다. 그나마 건물의 앞면만이 이러한 化粧의 ‘영화’를 누릴 뿐, 측면과 뒷면은 엉뚱한 붉은 벽돌이거나 허름한 페인트로 마감돼 버리고 만다. 철저한 허구요, 용감한 기만이다.

성채나 혹은 궁전으로 꾸며진 예식장 건축은 결혼을 동화의 한 장면으로 치환해 희화화한다. 서양 건축사 속의 파편들을 모아 맥락 없이 재구성한 듯한 혼란스러운 외양으로도 성채는 완성된다. 호들갑스럽게 꾸며진 창문은 열리지 않으며 지붕에 올라선 석상들은 그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이게 뭐람…” 이제 결혼의 엄숙함은 유희의 가벼움으로 대체되고 예식장은 주말이면 1시간마다 한 쌍씩 찍어내는 ‘기능’적인 자판기가 돼버리는 것이다. 신부의 집 마당에 차려졌던 전통적인 초례청이 지니는 설렘, 엄숙함 그리고 그를 둘러싼 흥취는 사라지고 빼곡한 주차장과 갈비탕 집만 남아버렸다. 이 번잡한 허구의 성채 안에 초대된 하객들은 끝까지 예식을 지켜보며 두 사람의 인생을 엄숙하게 축복하는 대신 피로연장으로 바쁜 걸음을 옮긴다. 속도전에 대응한 하객들의 온당한 선택이다.

식장이 제도화된 결혼의 건축적 반영이라면 러브호텔은 제도권 밖의 성적 결합을 가능케 하는 장소로, 도시의 구석구석, 혹은 전망 좋은 유흥지마다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다. 곧잘 성채의 모습으로 치장된 외관도 결혼식장과 러브호텔을 분간할 수 없게 한다. 말을 타고 해자를 뛰어넘어 성문으로 들어가던 왕자는 자동차를 몰고 가림막이 늘어뜨려진 주차장 안으로 유유히 빨려들며 사라진다. 이 궁전의 성벽과 가림막은 세상의 시선이 던지는 따가운 공격을 방어하는 장치가 되며 궁전과 성채로 은유된 외형은 고객의 안전을 보장하는 코드가 된다. 이 성곽은 이 곳을 찾는 은밀한 고객들을 기꺼이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로 상승시키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시켜 성채 안의 공간에서 만이라도 제한된 성적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유혹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곳에 들어선 고객은 기꺼이 환상과 신비의 마법에 걸려들고 성채가 보장한 성적 최면에 빠져든다.

길을 나서면 예식장이나 러브호텔의 이름에서 ‘궁전’이라는 단어는 무수히 찾아진다. 궁전장, 궁전예식장, 꿈의 궁전…. 우리 시대의 性은 마법에 빠진 성채에서 약속되고 최면에 걸린 궁전에서 은밀하게 분출된다. 性의 제단에 바쳐진 건축이 보여주는 쓸쓸한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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