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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윤리, 개인 아닌 학문공동체의 ‘공동 책임’이다”
“연구윤리, 개인 아닌 학문공동체의 ‘공동 책임’이다”
  • 김봉억 기자
  • 승인 2009.06.01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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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전문직윤리연구소 ‘연구윤리와 문화’ 학술대회 지상중계

한양대 전문직윤리연구소(소장 이현복 철학과)는 5월 27일 한양종합기술연구동(HIT)에서 '연구윤리와 문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연구윤리와 문화, 비교문화적 전통에서 본 창작과 표절, 연구윤리와 가치교육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됐다. 이날 학술대회 주요 발표 내용과 논평을 지상중계한다.  

지난달 27일 한양대에서 열린 전문직윤리연구소의 학술대회 모습. 교과부와 학진, 교수신문이 공동 후원했다. 사진 왼쪽부터 조민환 춘천교대, 민주식 영남대, 하병학 가톨릭대, 김준성 명지대, 김용헌 한양대, 손화철 한동대, 강준호 경희대 교수.

연구윤리와 공동체
이양수 한양대 교수(철학과)=현행 연구윤리의 시각은 주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 학문연구자의 과거 행위의 적절함을 따져 보는 데 치우쳐 있다. 이런 시각은 학문연구의 본래 목적이라 할 연구와 교육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연구윤리의 역할이 마치 감시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연구윤리는 다가올 미래의 위험을 윤리적 시각, 특히 학문공동체의 시각을 현재의 시점에서 대변하는 것이다. 미래의 위험은 어느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닌 인류 공동의 책임이다. 이 공동책임이 연구윤리 시각에서 중요한 이유는 학문공동체의 내적 선을 증진시키면서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다. 이제 학문연구는 개인이 독점할 수 없다. 사회제도, 공동체, 개인들의 조화로운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만 학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연구윤리의 출발점은 신뢰이어야 한다. 신뢰 없는 연구는 항상 악용과 시기를 남기지만, 신뢰는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인류가 편견 없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다리가 된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는 신뢰에 기반을 둘 때만 가능할 것이다. 학문공동체의 신뢰회복. 이것이 연구윤리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 현재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동양예술의 임모전통과 연구윤리
조민환 춘천교대 교수(윤리교육과)=
기본적으로 초학자나 숙에 이르기 전까지는 기존의 이상적인 혹은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된 작품 즉 ‘古’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을 臨摹할 것을 요구했다. 숙에 이르러도 계속적으로 임모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임모적 태도는 오늘날의 연구윤리 관점에서 보면 표절에 행하는 행위지만 옛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임모전통이 강한 동양예술은 철저히 下學而上達식이 적용되는 예술이다. 옛날 서화가들은 臨倣 한다는 것을 단순히 형상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단순히 형상만을 베낀다면 그것을 書奴 혹은 畵奴라고 비판했다. 자신이 임방 하고자 하는 작가는 이미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흠모한다. 아울러 이미 고인들의 예술정신과 정신경계가 뛰어났음을 이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말하는 표절이라고 비하하거나 크게 문제시 삼지 않았다. 창의적 창신을 강조하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임모에 의한 방고, 의고적 예술행위는 행해질 것이다. 동양예술에서 행해진 이런 예술행위는 오늘날 연구윤리에서의 표절이라 여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민주식 영남대 교수(미술학부)=동양예술의 전통 속에서의 임모와 오늘날의 연구윤리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표절이 과연 동일한 수위에서 비교될 수 있는 사항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발표자는 임모행위의 결과와 현대의 표절행위의 결과가 외견상 동일하다는 생각에서 임모를 표절의 일종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실은 동양의 고전 속에서도 임모라는 말 이외에 별도로 ‘표절’이라는 말의 용례와 관념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동양의 문화적 예술적 전통이다. 동양예술에서는 결과물의 가치보다는 제작 과정을 중시하며 삶의 방식을 우선시 한다. 그래서 동양의 예술을 단순한 재주의 발휘가 아니라 수련과 연마를 끊임없이 거듭해가는 도정이라는 의미에서 예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새로운 것, 혁신적인 것보다는 옛 것, 전형적인 것을 중시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점은 지금 이 시대에 표절과 같은 연구윤리가 왜 이토록 문제시 돼야하는가이다. 아마도 독창성을 중시하는 서구 근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미래 사회의 건설을 위한 동력으로서 창조성을 신봉하는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창작 윤리와 한국미술계의 구조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경영학과)=한국사회에서 직업 화가는 많지만, 아티스트는 적은 게 문제다. 요즘은 ‘시장’의 힘은 더 커지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지금 이 시장에서 어떤 작품이 팔리고, 관심을 받는가를 주목하고 비슷한 화풍의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팔릴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에만 작가들이 관심을 갖는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시장에서 어떤 작가로 인정받을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그 제도 속에서 많이 얘기되고 있는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화풍에 쏠리게 된다.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본질이 돼버린 현실이다. 오늘 작가들은 ‘스타 작가’시스템에 맞춰 나가고 있다. 작가라는 존재는 자신의 미술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의식이 부재한 속에서 다른 작품으로 대체되고 있고, 비슷한 작품이나 위작이 나오고 위작 시비가 알고 있는 것이다. 미술계 자체는 무엇일 수 있는가. 작가의 삶은 무엇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귀찮은 문제로 치부된다.  한국의 화랑은 구멍가게다. 현대 화랑들은 새 작가 발굴 역사인데. 화랑은 구멍가게 수준이다.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역할이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작품을 맞춰주는 역할밖에 없다. 화랑의 역할도 제고돼야 한다.

홍경한 <퍼블릭 아트> 편집장=양심마저 표절하도록 방치한 책임, 아티스트와 아티스트적 삶은 부재하고 미술제도와 시장만이 존재하도록 무관심하게 방기한 책임은 다름 아닌 지식인들의 몫이다. 우리나라 미술계 지식인들은 미술계 구조와 권력의 그늘 앞에서, 시장장악력을 위해 창작 윤리가 도태되는 현상과 진실의 호도와 기타 파생되는 문제를 목도하면서도 제대로 발언하는 이는 드물다. 지식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권력에 따라 좌고우면하는 게 아니라 작가들이 지향해야 하는 창조적 상상력과 그들의 인간성을 북돋우는 사회적 지식인으로서의 윤리적 실천성의 중요함을 먼저 캐치하고 방향을 터주는 조타역할이어야 한다. 무엇이 옳지 않고 배타해야 하는지 직시하고 있으면서도 묵묵부답인 지식인들의 행태야말로 심각한 도덕적 윤리적 병폐를 야기하는 실질적인 원인이며 동시대 한국 미술 발전에 있어 가장 큰 함정이다.

탐구와 소통의 학문하기와 학습윤리교육
하병학 가톨릭대 교수(교양교육원)=학부생 기준에서 연구윤리는 남의 일일 수 있다. 대학생들의 학습과 관련해 ‘학습윤리’라고 할 때 그들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이제까지 제시된 대학생들의 연구윤리 고취방안은 대학생들의 눈높이와는 사뭇 다르다. 기존의 방법은 규정과 처벌이 중심이었지만 안내와 인도(가이드라인)가 필요하다.
몇 개의 규정과 처벌로 학문윤리, 연구윤리, 학습윤리가 정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학계와 사회의 전반적인 물질주의를 얕본 결과라는 것이 발표자의 소견이다. 따라서 우리대학 교양교육원은 연구윤리가 설 수 있는 인문학적 토대 연구와 학습윤리를 체화할 수 있는 교육 콘텐츠 및 교육방안 개발과 학습윤리의 부정적 측면을 넘어 ‘창의적’으로 학문탐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방안 개발에 역점을 두고 있다. 왜냐 하면 연구윤리는 창의적 학문탐구와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의 강조를 넘어 ‘할 수 있는 능력’의 교육이 합목적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김준성 명지대 교수(철학과)=기존의 방법을 규정과 처벌로 이해하는데 논평자에게 그런 이해는 다소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학습윤리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1회(적) 교육에 어떤 차이를 보일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창의성이 동반된 교육이 되면 나아질 것 같다’는 말에 대해 ‘창의적’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어렵게 보는 것 같다. 문제와 답이 결정돼 있더라도 과정을 보는 것이다. 창의적이라는 말에 강박관념이 큰 것 같다.
학습법 보다 교수법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교수들이 표절이 가능한 과제를 낸다.  어떻게 보면, 과제를 잘 내면 부정행위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연구자 주도의 연구윤리 확립은 가능한가
손화철 한동대 교수(교양학부)=
연구자 주도의 연구윤리 확립이 가능한가? 연구윤리를 지켜야 할 사람들은 연구자들 자신이지만, 정작 연구윤리 확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정부나 관련 기관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연구윤리 확산 노력은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빠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연구자들의 거부감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윤리가 강조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일련의 연구부정 사건들에 대한 대응의 차원에서 연구윤리 관련 정책들이 만들어지다 보니, 이들이 미래를 대비하기 보다는 단기간의 성과에 집착하거나 징벌적인 요소를 가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연구자 자신이 아닌 정부와 기관의 지원과 압력을 통한 연구윤리의 확산 노력은 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또 연구윤리와 관련된 판단의 주도권을 정부가 가지게 되면 연구자들의 자율성이 침해될 소지가 있다.

강준호 경희대 교수(철학과)=현실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12조원이 넘는 국가예산에 관련된 연구자들의 행태에 국가가 아무런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연구자들은 일반인들보다 도덕적으로 탁월한, 말하자면 자율적 규제에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과학연구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현실을 통해서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구자들이 느끼는 거부감이나 피해의식 등이 정부개입이나 통제에 대한 반대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래도 여전히 전문가는 필요하다. <좋은연구>의 자료실에는 각 대학, 연구소, 학회의 연구윤리 규정이나 지침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이것들의 논리적·내용적 정합성이나 실효성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문제점을 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규정과 지침의 유용성은 줄어들 것이다. 향후에도 상당기간은 정부 주도적 연구윤리 확산이 현실적 대안이다. 다만 정부의 지원과 노력이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한양대 전문직윤리연구소는] 전문직 ‘책임·윤리’ 교육프로그램 연구 메카

한양대 부설 전문직윤리연구소(소장 이현복·철학과)는 의료인, 법조인, 공직자, 교육자, 엔지니어 등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전문직 종사자들과 앞으로 전문직으로 진출하게 될 예비 학생들에게 프로페셔널리즘(전문직업주의)과 사회적 책임의식, 윤리적 의사결정능력을 고양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연구·개발하기 위해 지난 2007년 7월 국내 최초로 설립됐다.

지난 2008년 8월에 학술진흥재단 연구윤리교육 지원 사업에 선정돼 ‘연구윤리’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연구소는 앞으로 △교양교육과 전문교육의 연계성 연구 및 교육프로그램 개발 △전문직윤리와 관련한 정책 연구 및 사회적 아젠다 연구 △전문대학원에서 필수적인 윤리관련 교과과정 개발 △전문직 윤리 관련 졸업인증제 프로그램 개발 등을 수행해 나갈 계획이다. 이현복 소장은 “전문직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윤리규범 확립을 위해 실천적 지침을 제공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7명의 연구원이 있다. 문의)한양대 철학과 02-2220-0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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