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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기초과학] ④ 화학
[위기의 기초과학] ④ 화학
  • 교수신문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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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5 00:00:00
이덕환 / 서강대·화학

작년에는 인문학이 위기라고 하더니, 새해가 열리기가 무섭게 자연과학과 공학이 위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수한’ 학생들이 모두 모인다는 의과대학도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본래 의학에는 뜻이 없는 학생들이 힘든 ‘메이저’를 외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문계 학과들도 ‘고시학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니, 우리의 대학은 특별히 어디라고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총체적인 위기에 처한 셈이다. 그러니 기초과학의 핵심인 화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우선 학생들이 화학을 외면하고 있다. 학부제가 시행된 이후로 대부분의 화학과는 그 규모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버렸다. 대학원의 경우에도 포항공대를 비롯한 몇 대학을 제외하면 심각한 정원미달 사태가 수년째 계속되고 있어서 대학원의 실질적인 학생 선발권은 사라져 버렸다. 학부생의 감소도 심각하지만, 연구조원과 학부 실험조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대학원생의 감소는 화학과의 운영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학부제의 도입으로 현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 지식을 갖춘 인력을 양성하기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공 분야의 지식을 충분히 갖춘 전문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교양 교육과 학생의 선택권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교육개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다시 도입한 학부제 때문에 강도 높은 전공 교육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졸업에 필요한 전공 학점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고, 학생들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과목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거기에 어줍잖게 시작한 강의 평가제도 때문에 학생들에게 힘든 공부를 강요하는 교수는 낮은 강의평가 점수를 감수해야만 하고, 자칫하면 그 능력까지 의심받을 수도 있게 됐다. 더욱이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학에 대한 연구비 지원정책과 평가제도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있다. 교수들은 연구 자체보다 연구비 지원 사업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하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대학원생을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화학의 위기는 현대 화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에서 시작됐다.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극도로 낮은 우리 사회에서 화학은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고, 학생들이 화학을 외면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다. 거기에 불합리한 교육개혁과 연구지원 및 평가제도가 화학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화학이 위기에 처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화학 자체의 특수한 성격에서 찾을 수도 있다. 19세기말부터 급속하게 발달한 현대 화학은 그동안 그야말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원천적으로 응용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화학은 의약품 개발과 진단 시약과 도구의 개발에 의한 보건 환경 개선, 농약과 화학 비료의 개발로 인한 식량확보, 염료, 고분자, 합성 섬유의 개발에 의한 생활환경의 개선 등에 크게 기여하였고, 최근에는 반도체와 첨단 소재 개발 등을 기반으로 하는 첨단기술의 시대를 열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생명공학기술, 나노기술, 환경기술, 우주항공기술, 정보기술, 문화기술 모두가 화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화학의 응용 범위가 크게 확대됨에 따라서 역설적으로 화학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화학은 독립된 학문 분야이기보다는 다양한 응용 분야의 도구적 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제 물질의 성질과 변환을 연구한다는 막연한 의미의 화학은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화학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화학의 성격에 대한 이러한 변화가 화학을 더욱 어려운 여건에 몰아넣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화학의 위기는 화학자들이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고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적 가치를 앞세운 응용 분야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고. 그동안 화학자들은 “기초가 튼튼해야 응용학문도 발전할 수 있다”는 알량하고 막연한 명분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결국 화학자들 스스로가 기초과학은 “응용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인정했던 셈이고, 화학의 미래는 경제력을 가진 기술자들의 관용과 아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화학이 그 본연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화학은 첨단 기술의 기초가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인류가 쌓아온 찬란한 문화유산 속에서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지식체계임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 화학은 단순히 기술 개발을 위해서 필요한 기초가 아니다.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물질의 변환에 의하여 일어나고 있는 자연과 생명의 오묘한 진리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지식체계인 화학은 응용 가능성과 관계없이 스스로 설 자리를 확보해야만 한다. 수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물리와, 물리적 법칙을 바탕으로 하는 화학, 그리고 화학적 원리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생명과학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 자연은 물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의 존재 의미를 밝혀주는 진리임을 당당하게 주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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