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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은 왜 시적 몽상과 현실적인 응시 사이에 멈춰서서 웅얼거릴까
박찬욱은 왜 시적 몽상과 현실적인 응시 사이에 멈춰서서 웅얼거릴까
  • 칸(프랑스)= 이상용 영화평론가
  • 승인 2009.05.19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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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_ 갈증나는, 정말 갈증나는 「박쥐」

올해 칸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가 다양한 섹션에 걸쳐 10편이나 소개 됐다.
그 중 수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는 주요한 섹션은 공식경쟁 부분이다(약간 예외적인 섹션들이 있기는 하다). 전통적인 칸의 레드카펫 행사가 열리는 공식경쟁 상영작은 10편의 한국영화 중 「박쥐」 한 편 뿐이다. 백편의 영화가 상영되더라도 공식경쟁 부문에 한국영화가 없다면 작품상이나 감독상과 같은 주요 부문의 수상은 가능할 수 없다. 한국 언론들이 마치 스포츠 경기 중계하듯 보도하는 ‘수상’ 여부는 오직 「박쥐」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셈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박쥐」의 공식적인 시사는 열리지 않았다. 공식 상영에 앞서 두 차례의 프레스 시사회가 열렸고, 이를 바탕으로 데일리를 발행하는 주요 매체를 통해 「박쥐」의 공식적인 품평이 시작됐다. 데일리를 발행하는 <버라이어티>지는 「박쥐」를 두고 새로운 성향의 뱀파이어 영화라고 운을 띄우면서도, 정작 박찬욱의 영화로서는 새롭지 않다는 견해를 던졌다. 관심의 초점은 이 영화에 출현한 김옥빈이었다. 화면 가득 메운 그녀 모습은 확실히 고혹적이다. 동양 여배우들은 깐깐하기로 소문난 칸에서도 거대한 매혹을 안겨주며,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친절한 금자씨」에 이어 박 감독이 여배우의 이미지를 새롭게 창조해 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박쥐」의 진정한 주인공은 송강호가 연기하는 상현이다. 신부이자 뱀파이어인 상현은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를 오가는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에는 선한 기운도, 악한 기운도 뚜렷하지 않다.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순순하게 감내해내는 캐릭터에 가깝다. 그의 기도를 음미해 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고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惡의 증폭 또는 번뜩이는 삶의 아이러니


상현의 담담한 기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내적 충돌의 순간에 빠져들지 않도록 만든다. 자신의 몸을 실험실의 희생양으로 내놓은 신부가 ‘뱀파이어’로 대변되는 쾌락주의에 물들게 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것인가. 박찬욱의 영화는 항상 의외의 두 상황을 대립시키며 인간적, 도덕적 갈등을 풀어 놓는다. 그것은 박찬욱의 영화를 감싸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초인이자 초법적인 존재로 설정했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상현은 자신을 삶의 실험도구로 던지는유형의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회심 하게 되는 것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창녀가 된 소냐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구현했던 로베로 브레송의 「소매치기」를 따르자면 이것은 “당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모르는” 것이 된다. 이는 하나의 구원의 서사를 이룬다(「친절한 금자씨」).그런데, 「박쥐」는 더 이상 구원과 은총을 소망하지 않는다. 김옥빈이 연기하는 태주라는 인물이 가세하면서, 그녀의 백치미를 통해 강조되는 무지함은 惡을 증폭시킨다. 위대한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악’을 도입하는 것은 오래된 방식 중의 하나다. 이들에게 범죄는 삶의 실험이고, 자기 정화과정이다. 박찬욱의 복수시리즈인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라는 욕망의 구현을 통한 자기 구원과 연민의 드라마였다.


그런데 「박쥐」는 영문 제목인 ‘Thirsty'가 상기하듯이 더한 ‘갈등’(갈증)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나아간다. “난 뭐지? 난 좋은 일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난 악한 사람이 아닌데. 근데 난 살인을 했어. 죄를 지었어.” 의도와 결과가 다르게 펼쳐지는 갈등은 「박쥐」가 보여주는 블랙 유머의 정체이자 번뜩이는 삶의 아이러니다.


문제는 하나의 장면들을 놓고 보면, 이처럼 음미할 구석이 많지만 그의 영화에는 매력적인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만 숲이 보이질 않는다. 박찬욱에 대한 찬반이 갈리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그의 세계를 여러 차례 파악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삶의 파편들을 허용할만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단 한 편의 영화만 놓고 생각해 보면 거칠고 너무 많은 말들이 한 장면에 흩어져 있다. 박찬욱의 스타일이 그렇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표작이자 서구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올드보이」가 복수의 비밀을 맨 마지막에 남겨둠으로써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밀고 갈 힘을 만들 수 있었다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보듯이 그의 영화는 자주 균열적이고 파편들을 늘어놓는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부족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박찬욱은 장면에 세공을 들이며, 풍부한 거리와 물신화된 기호들을 유포하는 데 재능을 발휘한다.


영화 속에서 발휘되는 웃음도 잘 따져보면 한 장면에 종속됐을 뿐, 전체적인 흐름이나 매끄러운 고리가 되지 못한다.
이는 특유의 과잉된 표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화려한 영화의 수사학과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관계는 닫혀있다.

희화화된 갈등의 한계


이러한 폐쇄성으로 복수의 윤리성이라는 철학의 문제를 제대로 대면할 수 있을까. 인공적인 이 영화의 지향점이 타자의 윤리를 강조해야 하는 주제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박찬욱은  특유의 과감한 표현 능력을 증명하지만, 갈등이나 윤리를 해결하기보다는 그 갈등을 희화화하고 전시하는 데 몰두한다. 호의적으로 보자면 그의 영화가 서사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시적인 감수성을 동원하는 탓이리라. 하지만 시적 몽상과 현실적인 응시 사이에서 뚜렷한 말하기 방식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인상은 강하다. 그의 화면은 눈을 사로잡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말들은 여전히 웅얼거림에 가깝다.

이러한 폐쇄성으로 복수의 윤리성이라는 철학의 문제를 제대로 대면할 수 있을까. 인공적인 이 영화의 지향점이 타자의 윤리를 강조해야 하는 주제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박찬욱은  특유의 과감한 표현 능력을 증명하지만, 갈등이나 윤리를 해결하기보다는 그 갈등을 희화화하고 전시하는 데 몰두한다. 호의적으로 보자면 그의 영화가 서사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시적인 감수성을 동원하는 탓이리라. 하지만 시적 몽상과 현실적인 응시 사이에서 뚜렷한 말하기 방식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인상은 강하다. 그의 화면은 눈을 사로잡지만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말들은 여전히 웅얼거림에 가깝다.

칸(프랑스)= 이상용 영화평론가

필자는 1997년 <씨네21>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면서 평단에 데뷔했다. 평론집으로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등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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