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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리뷰] 9.11 테러 이후를 진단하는 계간지들의 面面
[계간지 리뷰] 9.11 테러 이후를 진단하는 계간지들의 面面
  • 교수신문
  • 승인 2002.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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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7 10:33:51
2002년 봄호 계간지들이 집중하고 있는 문제는 9·11 테러 이후이다. 특집을 살펴보면, ‘당대비평’의 ‘고삐 풀린 세계화, 그 준비된 길 위에 선택은 있는가’, ‘창작과비평’의 ‘테러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 ‘실천문학’의 ‘미국의 세계화 전략과 민족의 운명’이 눈길을 끈다. 여기에 뒤늦게 나온 ‘비평’ 겨울호의 특집 ‘9·11 테러 다시 읽기’까지 포함했을 때 우리 지식계의 풍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는 분명하다. 이러한 기획이 흥미로운 점은 잡지가 지향하는 성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에 나온 ‘비평’은 “필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고, 글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을 최대한 넓히고자 한다”라는 기획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미국이 세계 경영을 위해 어떻게 하면 극한대립을 피할 수 있는가의 입장을 개진한 헌팅턴, “우리는 여전히 역사의 끝지점에 서 있다.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만이 장차 전세계적 차원의 지배적인 형태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후쿠야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소 납득하기 힘들 정도이다. 여기에 “악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다”라며 “선은 악을 없애지 못하고 악도 선을 제거하지 못한다. 선과 악은 뒤엉켜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입장까지 포함시킨다면 서구 지식인의 한계는 명백하게 다가온다.

지라르, 에코, 벡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은 이론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현실과 거리를 둘 수 있는가 정도. 그나마 의미 있는 글이라면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미 보복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꼽을 수 있다. 미국은 안전한 천국이라는 인식의 환상이 실재의 삭막한 사실 앞에서 완전히 허물어지는 순간의 충격, 그로부터 제기되는 미국의 “이런 일들이 여기서 일어나서는 안 돼!”와 “이런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돼!” 사이의 선택이 지젝의 글에서 눈길을 끈다. ‘헤게모니’ 개념과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하여 미국 보복전쟁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김 교수의 글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비평’의 특집을 읽다가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생각. 겨우 이 정도의 생각, 특히 오만한 후쿠야마의 입장 따위나 들으려고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을까. 이는 결국 ‘비평’의 정체성을 묻는 일이 될 터인데, 한국의 지식인으로서 어느 정도 여과의 역할을 감당할 필요로 연결된다. 9·11 테러가 왜 발발하게 됐으며, 그 충격 이후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게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묻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의식이 아닐까.

‘당대비평’에 실린 글들은 계급적인 관점으로 통일된 인상을 준다.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어서 벽에 부딪혔던 신자유주의 흐름이 테러 이후 ‘선·악’의 외피를 입고 급격하게 확산된다는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흥미를 끄는 글은 최병두 대구대 교수의 ‘세계화와 초테러리즘의 지정학’과 마이클 만 UCLA 교수의 ‘세계화와 9월 11일’. 냉전체제가 해소되면서 지적학적 중요성의 문제가 다소 잠잠해졌지만, 이번 미국의 보복전쟁은 지정학의 중요성을 일깨운다는 것이 최 교수의 주장이다.

9·11 테러는 국가 대 국가의 형태로 충돌하던 전쟁의 형태가 아니라 비국가 또는 초국가 단위의 전쟁이 수행될 수 있는 형태를 보여준 것이고, 이러한 가능성을 이용하여 미국은 자신들에게 지정학적으로 필요한 곳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테러 이전부터 아프가니스탄 공격계획을 세우고 있던 미국이 정확한 물증도 없이 그곳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첨언하자면, 최 교수의 글과 ‘창작과 비평’에 실린 윤영관 서울대 교수의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의 국제정치와 한국’을 겹쳐 읽기를 권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가치야 누차 얘기된 바지만, 현재의 상황과 맞물리는 양상이나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경제 건설의 시급함 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만의 글은 이데올로기적(또는 문화적)·경제적·군사적·정치적 조직이 상호작용하는 네크워크들의 확장으로 세계화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당대비평’의 아쉬운 점은 실린 글들의 내용이 자주 겹친다는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의외로 다가오는 것은 ‘창작과비평’의 낙관적 전망. 백낙청 서울대 교수는 ‘한반도의 2002년’에서 “상대적 안전지대로서의 한반도”를 얘기하며 “암흑의 시기에 한반도가 비교적 예외에 해당하는 지역이 될 수 있는 근거”를 대고 있다.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 대규모 전쟁의 위협이 크기 때문에 산발적 국지전이나 한정된 보복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 둘째, 자신의 의사에 반해 만들어진 분단 체제에 대한 한반도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전망 위에서 특집은 ‘동아시아’로의 판짜기 모색으로 이어진다. 전술한 윤영관 교수의 글, 와타 하루끼 일본 도쿄대 교수의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일본’, 지명관 한림대 교수의 ‘동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자’가 대표적이다.

물론 동아시아에 대한 관점은 긴급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테러 이후의 세계’를 얘기하면서 곧장 그리로 나아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예컨대 보복전쟁에 일본이 참여한 까닭은 무엇인가. 자위대 파병과 군사 대국화의 욕심을 미국으로부터 승인 받기 위함이 아닌가. 또한 일본정부의 국제공약인 무라야마 담화가 계속 어겨지는 것은 어떠한가. 이러한 부분들을 우회하며 동아시아적인 관점을 주장하는 것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창작과비평’의 낙관적 전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천문학’에 실린 김연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의 ‘부시 행정부와 남북관계: 과제와 전망’은 ‘창작과비평’의 낙관에 대한 비판으로 읽으면 딱 맞는다. 구체적 국제현실에 바탕하여 남한과 북한의 현재 사안과 2002년의 중요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 있다. 또한, 김명섭 한신대 교수의 ‘세계라는 이름의 미국과 미국이라는 이름의 세계’는 제국의 안과 밖을 넘나들기 위한 시각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전면적 쇄신의 의지를 표방한 이번 ‘실천문학’에 두 글이 어느 정도 다가간 셈인가.

홍기돈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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