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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한글전용은 타의의 산물, 한자문화전통 살려야”
[주장] “한글전용은 타의의 산물, 한자문화전통 살려야”
  • 교수신문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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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5 00:00:00
이번 호에는 논쟁적인 기고 글 하나를 싣는다. ‘한글전용주의’에 대해 정면 비판하는 ‘국한문혼용’을 주장하는 이 글의 필자는 필명을 ‘대구 新川居士’라고 밝히면서, “이름 석자를 드러내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그러나 내 주장에 대해 언제든지 논쟁할 준비가 돼 있다”고 한글전용론측의 반박을 은근히 기대했다.

국어 표기를 두고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글전용론자들과 국한문혼용론자들이 논쟁을 벌여왔지만, 두 진영측은 팽팽한 시각차만 거듭 확인하고 있다. 고 남광우 박사의 경우, “광복후 남북한의 어문정책이 김두봉(북), 최현배(남) 두분에 의해 주도되면서 인위적인 신조어를 남조했고 결국 실패했다”고 한글전용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어문연구회 등을 축으로 해서 이 같은 비판론이 이어지고 있다. 한글전용론과 국한문혼용론은 주로 민간 단체를 중심으로 1980년대까지 지루한 논쟁을 되풀이해왔다. 1980년대 이후 정부 차원에서 언어정책이 추진됐지만, 혼란스러움은 가시지 못한 상태.

유목상 중앙대 명예교수(국어학)는 “내가 옳고 니가 그르다는 식의 지루한 논쟁, 대립되는 소용돌이 속에 발을 담그기보다는 합리적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면서 “15세기 중엽 ‘용비어천가’의 경우처럼, 한글로 뜻이 전달되면 한글로, 한자로 적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한자로 적는 방안”을 제기한다. 크게 보면 유 교수의 경우는 국한 병기의 시각인 셈. 그러나 한글전용-국한문혼용을 두고 국어학계와 관련 학계가 오랜 갈등과 대립을 벌여온 것을 생각할 때, “내 주장만이 옳다”는 모난 논쟁은 ‘대화’로써 지양할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말과 글은 그 社會 어느 時點에 주어진 生活與件으로서, 생각 없이 使用하는 물건이다. 물과 空氣와도 같이 그속에서 논다고 할까. 이런 日常生活의 大前提를 들먹거려 檢討를 加한다는 것은 普通사람들에게는 짜증스러운 일이다. 남들이 하는대로, 新聞에서 읽은 대로, 學校에서 배운 대로 나도 하면 그만인 것을, 왜 그것을 들먹거려 神經을 쓰게 하느냐는 것이다. 現狀維持의 慣性은 이렇게도 무겁다. 現行하는 한글 專用主義에 挑戰하는 데는 이런 隘路가 있다.

이런 不平을 잘 알면서 왜 挑戰을 해야만 하는가. 첫째, 漢字가 섞인 글과 한글一色의 글을 比較할 때, 어느 쪽이 더 빨리 눈에 들어오는가. 한글 바탕에 異物質이 들어 있으면 이 덩어리 文字(漢字의 異名은 ‘方塊字’다)가 눈에 더 잘 들어 온다는 데는 是非의 餘地가 없을 것이다. 이 熾烈한 競爭時代에 우리는 왜 조금이라도 情報傳達 速度에 損害를 甘受해야 하는가. 이것은 看過할 수 없는 問題다.

경쟁시대의 효율적 정보전달

漢字가 어려워서, 하는 것이 漢字를 안 쓰는 理由라면 이것은 잘못이다.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듯이, 漢字의 모양을 본받아 쓰는 것을 좋아 하고, 이것이 아이들의 知能 發達을 促進시킨다고는, 벌써 日本에서 硏究되고, 證明된 사실이다. 表音文字(알파벳이나 한글 같은)를 익히는 것과, 漢字의 뜻과 形態를 入力시키는 것은 벌써 頭腦 活動機能에서 다르다고 한다.

日常 常用漢字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 限定된 漢字로 우리의 情報交換이 그렇게 速히, 쉽게 이루어진다면? ‘民主主義’, ‘大韓民國’ 같은 흔해빠진 單語라도, ‘민주주의’, ‘대한민국’보다 다만 몇 秒나마 우리는 더 빨리 認知할 수 있다.

깊이 없이 겉도는 말

正確한 情報傳達를 위해서도 漢字 語源을 밝혀주는 것은 必須的이다. 75%나 漢字語로 돼 있다는 우리 語彙에 同音異意가 얼마나 많으냐. 흔히 하는 ‘연패’란 말은 ‘連覇’인지, ‘連敗’인지. ‘속보’라면 ‘續報’인지, ‘速報’인지. ‘전반’은 ‘全般’이란 뜻인지, ‘前半’이란 뜻인지. 이런 例는 不知其數다. 웃지 못할 意味의 混亂을 가져 올 수 있다.

表音으로만, 卽 한글로만 얻은 單語의 知識은 漢字로 語源을 알고 얻은 知識과는 그 質 이 다르다. 正確한 知識이 아니라, 흔히 어렴풋이 짐작하고 아는 知識에 그친다. 例를 들 어, 지금은 行政用語로 거리낌 없이 쓰이는 말로, ‘과태료’란 것이 있다. 罰金, 혹은 課徵 의 뜻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顯著한 잘못이다. ‘過怠料’란 漢字가 말해주듯, 公金을 納入할 期限을 넘겼을 때 그 怠慢에 대하여 물어야 할 윗돈이다. 二次的인 課徵인 셈이다. 이 뿐이랴. 이러한 曖昧模糊한 말 버릇은 每日 新聞, 雜誌, 其他 刊行物에서 심심찮게 본다. 사람이 죽은 것을 ‘운명을 달리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 때 ‘운명’은 ‘殞命’으로, 그것만으로 목숨이 떨어졌다는 말이 된다. 누구밑에서 공부했다는 뜻으로 ‘사사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師事’란, 文字 그대로 스승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사사를 받았다’ 하면 스승을 弟子로 만드는 것이니, 이런 고약한 말이 있는가.

파탄에 이른 언어생활

韓國에서 大學을 마친 어느 學生이 日本에 가서 처음으로 ‘수소’란 물과 關係있고, ‘산 소’는 신 맛과 關係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거기서는 ‘水素’라 쓰고, ‘酸素’라 쓰는 것이다. 世界旅行家로 잘 알려진 어느 旣成 著者가 中國語를 배워보고 처음으로 ‘의도’ 란 뜻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고, TV에서 告白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 모두 ‘의도’란 말은 쓰고 있지만, 그것을 ‘意圖’로 알고 쓰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 것이 지금 우리 國民의 言語水準인 것이다. 이런 엉성한 意味世界에서 人文學의 水準은 可知다. 果然 人文學의 危機의 소리가 높은데, 그 原因이 여기 있다는 것은 擧論되지 않고 있다. 善工은 先利器라, 卽, 먼저 연장을 잘 들게 하라 했는데….

우리의 言語生活이 이 地境에 이른 데는, 첫째, 그릇된 民族主義, 두 번째로, 지금 판을 치고 있는 西洋文化와 그 알파벳 글에 대한 模倣心理,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이든 安易 하면 그만이라는 風潮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舊韓末 ‘迎恩門’을 부수고 ‘독닙문’을 세운 心理로 한글만이 民族의 얼인양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文化이고 傳統이고 다 歷史의 蓄積에 不過한 것이다. 日本의 어느 著名한 作家는 “내게 만약 漢字使用을 禁한다면, 그것은 나를 新石器時代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다”고 한 것을 보았다. 그 동안 文化蓄積을 다 지워버리고 살라는 말이냐는 것이다. 우리의 境遇가 日本에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日本은 우리 만큼 漢文의 支配를 받지 않아, 現在 土俗語의 文章語彙가 우리보다 越等히 豊富한 나라다.

이 作家는 蒙古語를 專攻했는데, 蒙古는 漢字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으로 文化發展이 없었다고도 했다. 漢字의 縮約性을 모르니, ‘鉛筆’을 ‘납의 붓’(호르고르진 빌)이라고밖에 表現을 못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75%나 되는 漢字語를 全部 ‘배꽃 계집아이 큰 배 움집’(梨花女子大學校) 식으로 바꾼다면 그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글一色을 先導하고 있는 韓國의 매스컴이 近來 ‘與小野大’ 란 新造 漢字語를 내 놓았다. 이것이 漢字의 縮約性 없이 우리 말이 成立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證明한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문자세계와 의미 차원

이 밖에도 到處에 漢字敎室이 생겨나고, 書藝가 盛行하고, 東洋古典이 復活하는 것은 무 엇을 示唆하는가. 우리 文化는 畢竟 漢字文化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토박이 말은 活潑히 發掘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文字文化는 하나가 또 하나를 갈아치울, 그런 性質의 것이 아니다. 漢字語만 羅列하면 迂遠하고 陳腐的한 글이 될 수 있고, 토박이 말을 잘 섞으면 오히려 眞率하고 迫力있는 效果를 얻을 수 있다. 漢字語와 토박이 말의 妙한 交織에서 좋은 文章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그 동안 自然環境의 無謀한 破壞를 反省하고, 그 復舊와 保護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 동안 漢字를 모르는 讀者를 量産하고, 公文書에서 漢字를 追放하고, 甚至於는 文化遺蹟에까지 元來 漢字를 한글로 덧칠을 한 것은 더도 덜도 없이 精神環境의 破壞였다. 中國의 ‘文化革命’보다도 더 무서운 文化破壞가 아닐까 한다. ‘光化門’이란 扁額을 달 때는 거기에 뜻이 있었다. ‘광화문’에는 뜻은 없고, 指稱이 있을 뿐이다. 郵便物 配達에 필요한 記號일 뿐이다. 나는 지금 우리 文字世界에서 意味의 次元을 剝奪하지 말라고 呼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글專用만 아는 讀者層은 自意가 아니라 他意에 의하여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그동안 그릇된 文字政策의 被害者다. 그러나 이 層은 두텁고, 冒頭에서 말했듯이, 익숙한 習性은 흔들리기를 싫어한다. 위에 늘어놓은 내 말이 說得力이 있었을까. 不足했다면, 나는 우선 文化의 多樣性의 이름으로 呼訴하고 싶다. 用途에 따라, 嗜好에 따라, 漢字가 없는 글에서부터 많이 섞인 글까지 多樣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當然하게 생각하자. 여기에는 우선 文化事業으로서의 出版界의 自覺이 必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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