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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역원근법과 인문학
[학이사] 역원근법과 인문학
  • 교수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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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5 00:00:00

군대 시절에 배운 정찰 요령에 의하면 전방을 관찰할 때는 근경부터 원경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어 있었다. 먼 위험보다는 가까운 위험이 더 큰 위험이기 때문이다. 위험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먼 것보다는 가까운 것이 중요하며, 가까운 것을 자세히, 그리고 크게 보는 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념적 세계에서는 그 반대되는 현상이 보이기도 한다. 공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먼 것을 중요시하고 가까운 것을 경시하도록 만드는 것은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 주민들을 길들이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단계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조선 식민지 사람들이 가까운 자기네 일상생활을 우습게 보도록 교육하였다. 가까운 부모형제를 멸시하게 만들었다. 가까운 시대의 역사를 부끄러워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반드시 식민지 시대에 생겨난 것만은 아니다.

조선시대, 사람은 당연히 초상화의 주제가 되었지만 불특정 인물이 그림의 주제가 되는 경우는 흔치않다. 흔히 민화라고 부르는 낙관 없는 그림은 대체로 산수나 동식물을 그렸을 뿐, 이름 없는 사람을 그린 경우가 매우 드물다. 단원이나 혜원의 그림이 주목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물화라고 부를만한 그림에는 책거리 그림이 있다. 특히 이 장르에 속하는 그림에서 잘 나타나는 표현기법에는 逆遠近法이라는 것이 있다. 가까운 것이 크게 표현되고, 먼 것이 작게 표현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된 이래의 서양식 원근법과 반대로, 먼 것이 크게, 그리고 가까운 것이 작게 표현되는 이 기법은 단순히 표현을 위한 기법이었을까. 認知를 떠난 표현이 가능한 것일까.

단원의 ‘타작’ 그림은 이런 질문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화폭의 위쪽, 그러니까 먼 곳에 반쯤 누운 자세로 담배를 피우고있는 양반 지주의 모습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크게 그려있고 화폭 아래쪽에(가까운 곳에) 그려진 농민들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작게 그려진 것이다. 이러한 역원근법이 의도된 표현기법이라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표현이란 말인가. 이 역원근법은 사회적 위세를 바탕으로 한 인지 방식의 노출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지주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한 대인지각 방법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닐까.
높은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책거리 그림의 주제가 가까운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겠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먼 세상에 속하는 것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먼 것을 크게 보는 자세는 표현기법 뿐만 아니라 주제의 내용에도 또다시 나타난다. 사방탁자와 문방사우, 그리고 책들이 상투적인 주제인데, 가구와 문방구가 국내산으로 보기 어려운 것들이 많고, 특히 책들의 모습은 거의 모든 그림에서, 그것이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장정도 그렇지만 책들이 한결같이 書帙로 말아놓은 것들이라는 사실이 淸版임을 말해준다.

뿌리깊은 역원근법적 사물인식을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인문학을 살리고 우리의 인문학도들이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우리가 외국 학문의 소비자 노릇만 하고 살아왔다면 그 까닭의 하나는 우리가 학문의 원자재를 스스로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민중의 일상생활, 그리고 가까운 과거를 實事求是 정신으로 알아내는 일은 이 시대에 빚지고있는 우리의 직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대인 20세기에 대한 증언은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맡을 수 없다. 그것은 학자이기에 앞서는 시민으로서의 사명이기도하다.

시민사회에 봉사하는 인문학,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국산 인문학을 만드는 과정에서 건너뛸 수 없는 이러한 작업은 19세기에 성립된 학문의 분과 체계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할 것은 학제적 작업의 단계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통학적(unidisciplinary) 단계를 겨누지 않으면 그러한 작업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예측하건대, 현대 민중생활의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지 따지다보면 우리의 연구 대상은 이미 없어진 다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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