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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자의 시선] 성적 위계와 차별의 종말, 상상해볼 만한 가치 있다
[여성주의자의 시선] 성적 위계와 차별의 종말, 상상해볼 만한 가치 있다
  • 박연규 독립연구자
  • 승인 2009.05.11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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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간 대화로 읽는 학술키워드_ 18. 성의 종말

 

출산을 위한 이성간 삽입성교만을 있을 수 있는 성행위로 인정하면서 피임기술에 반대해온 가톨릭 교황이시라면 혹,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을 두고 곧장 ‘성의 종말’이라고 부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것과 별개로 사람들은 피임약이나 피임기구를 활용하면서 활발하고 다양한 성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이성간의 삽입성교만이 유일하게 성행위내지 ‘섹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다른 많은 즐거움을 미리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인간이 무성생식을 하는 날


게다가 ‘성’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폭넓게 쓰여서, 생물학적으로 무성생식과 구분해 ‘유성생식’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으로 남/녀에게 다르게 부과하는 성역할을 의미하기도 하고, 아이를 만드는 생식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여러 가지 에로틱한 행위나 취향, 단지 남/녀 두 항만이 아닌 가지각색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 등등까지 뭉뚱그려 부르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종말에 이르는 사태란, 가능성은 커녕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이런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작가의 상상력을 빌려보겠습니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프랑스에서 68혁명세대가 쟁취한 성의 자유라는 것이 결국은 ‘즐기지 말라’는 명령보다 더 잔혹한 ‘즐기라’는 명령을 모두가 강박처럼 따르는 것이 돼버린 상황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성해방을 외쳤던 68이후 이성간 선교사 체위뿐 아니라 동성애, 집단난교, SM, .... 온갖 성행위 방식을 인정하고 즐길 수 있는 사회적 공간 및 집단이 생겼는데, 그와 함께 사람들은 더 잘 즐기는 사람, 더 성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끝없이 다이어트를 하고 각종 약물 및 수술을 고려하며 자기 외모와 재정상태에 만성불만인 체로 조울증을 오가며 시달립니다.

이런 ‘즐거운’ 지옥 속에서 구원받기 위해 결국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성과 생식의 공산주의를 기획하기에 이르는데, 이 새로운 공산주의란 바로 유성생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유전자와 외모가 완전히 똑같아서 서로 차별할 가능성이 적고, 특정한 방식의 성행위만 특권화하지 못하도록 성감대가 몸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도록 조작된 복제인간들만으로 이루어진, 시험관복제를 통해 인구를 재생산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성생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기존의 ‘성적인 것’은 완전히 종말을 맞는 혁명이랄까요. 

단성생식이나 무성생식이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니, 우엘벡의 주인공의 기획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허황된 것만도 아닌 셈입니다. 이를테면, 2004년 <네이처>지에는, 쥐의 난자 두 개를 가지고 정자없이 수정란을 만들어냈다는 실험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그 즈음에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도 복제인간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며 이목을 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단성생식이나 복제를 과연 원하기는 할 것인가 입니다. 인류학자 게일 러빈(1984)은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방식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개인의 성적행동에 따라 위계를 나누고 차별하는 사회적 기제를 말한 바 있습니다. 높은 위계에 속하는 성적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평가와, 사회적 존중을 부여하면서 제도적 지원과 물질적 이득을 줍니다.

즐거운 종말을 상상하며


반면, 낮은 위치로 간주되는 성적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신병이거나, 존중받을 만하지 못하거나, 범죄거나, 자유로이 이동, 이주할 수 없도록 만들거나, 제도적으로 지원받을 기회를 박탈하고 경제적 궁핍으로 내몰립니다. 이를테면, 현재 한국에서 그 위계의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성애 부부일 것입니다. 저출산이 ‘위기’로 부각되면서 저 범주에 속해야 납세나 집장만에 더 혜택을 받기도 합니다.

생식세포와 배아를 몸 바깥으로 꺼내 조작할 수 있는 현재의 기술만으로도 한 아이에 대해 난자상, 자궁상, 양육상 등등 어머니가 여럿이 된다든가, 아버지 없는 가족이라든지, 동성커플간에 아이를 낳는다든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결혼한 이성부부의 불임‘치료’를 위한 기술로만 주로 쓰이고 있는 상황은 앞에서 말한 사회의 성적 위계를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결혼한 남녀와 그 생물학적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유지하는 것도 무척 힘들지만(현재 한국의 양육/교육비는 출산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무시무시하지요), 또 그게 아닌 다른 가족형태를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상상하고 추구하기도 참 힘든 사회입니다.

‘성의 종말’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에, 혹은 현재, ‘성’이라고 이름 붙여 불러낼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실체가 있었거나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점에 주의한다면, ‘성적인 것’으로 묶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종말까지는 아니라도, 현재 존재하는 성적 위계(앞에서 말했듯, 남/녀 간의 차이뿐 아니라 갖가지 성적 취향, 행위, 정체성 등등에 따른 위계)와 차별의 종말이라면, 상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100년 쯤 후, 현재 대부분의 사람이 굳이 남녀커플을 이루어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을 우스꽝스러운 옛 풍습 정도로 여기는 시대가 올 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박연규 독립연구자

필자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를 졸업했으며, 『프랑켄슈타인의 일상-생명공학시대의 건강과 의료』등의 저서가 있다.  <여/성이론> 편집위원을 역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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