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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끄는 지적 패기 … 마르크스와 모스의 협력가능성 주목
시선 끄는 지적 패기 … 마르크스와 모스의 협력가능성 주목
  • 이현우 서울대 강사·노문학
  • 승인 2009.05.11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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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서정은 옮김│그린비│2009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서정은 옮김│그린비│2009

“나는 여전히 만약 우리가 신자유주의적 철학이라 불릴 만한 그 무엇, 또 인간 조건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에 대한 대안을 찾고 있다면, 가치이론에 대한 고찰이 하나의 유익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가능한 최대한의 물질적 부와 쾌락,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들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전통이라고 부를 대안적 지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것인데, 이는 일견 고정된 사물처럼 보이는 대상을 운동의 양태로서, 고착된 사회구조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행위의 양식으로 인식하는 전통을 의미한다.

이런 지적 전통에 입각해, 나는 가치란 특정행위가 더 큰 사회적 총체성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행위자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서 인식되는 방식으로 규정돼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많은 경우 문제의 총체성이 주로는 행위자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서론 중에서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제목에서부터 전형적인 학술담론을 떠올리게 한다. 600쪽에 이르는 국역본의 두툼한 분량부터가 일반 독자들에게는 거리감을 불러일으킬 텐데, ‘인류학적 접근’이라니. 아예 독자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류학 전공자도 아닌 처지에 이런 ‘원천봉쇄’까지 뚫고서 이 책에 접근해보려고 한 것은 순진한 것일까, 무모한 것일까. 나대로 변명을 찾자면, 서문에서 내비친 저자의 지적 패기에 이끌린 것이라고 해야겠다. 요즘 점점 드물어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러한 패기 아닌가.

저자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기념비를 세우거나 각 학파의 신념과 입장을 방어하는 논쟁의 생산에만 몰두”하는 학계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대륙의 정통 교육코스를 거친 소수의 엘리트만이 사유체계와 개념을 생산해낼 수 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 대한 주석가가 되고 마는” 지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인류학이야말로 이런 식의 고루한 헤게모니에 맞서 싸우면서 사유와 개념의 전지구적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학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유혹으로서 충분히 강력하다. 제국주의 학문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식의 인류학에 대한 선입견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저자를 따라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가치에 대한 이론이 최근 인류학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는 소개를 읽게 된다. 일단 ‘가치’라는 말 자체가 복수적 의미를 갖는다.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사회학적 가치, 경제학적 가치, 언어학적 가치가 각기 다른 의미로 정의된다. 이러한 의미의 애매성을 제거하고 ‘가치’ 혹은 ‘가치체계’에 관한 인류학적 사회이론을 정립할 수 있을까. 선구적인 시도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인류학자 클라이드 클럭혼이 출범시킨 일련의 연구 프로젝트다.

서로 다른 다섯 부족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서 클럭혼은 가치에 대한 정의를 발전시켜나가는데, 가치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정의는 “사람들이 여러 다른 행위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즉, 가치를 추상적인 삶의 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질적인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개념들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바람직한’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지만, 클럭혼의 프로젝트는 더 진행되지 않았고, 가치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유예됐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가치’는 경제학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됐다.

경제학은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과 관련된 만큼 집단적 차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학과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으며 가치에 대한 접근도 그만큼 상이하다. 알다시피 경제학의 전제는 간단하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돼 있고, 모든 개인은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즉 그들은 최소한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서 최대한의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이것이 경제학의 ‘최소/최대’ 접근법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망과 쾌락에 연결돼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초콜릿 치즈 케이크는 당신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만족감A).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날씬하다고 생각하는 평판도 당신에게 만족감을 준다(만족감B).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행위자는 이렇듯 상충하는 만족감을 서로 비교해 자신에게 보다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 즉, (만족감A - 만족감B)의 값이 0보다 클 경우엔 초콜릿 케이크를 먹어도 되고, 0보다 작을 경우엔 안 먹으면 된다. 이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 과정을 모델화하는 경제학에서 ‘사회’라는 존재는 무의미하거나 걸림돌만 된다는 사실. 왜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는 초콜릿 케이크 대신에 소금에 절인 자두 음료가 더 큰 만족감을 주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비만으로 간주되는 체형이 다른 지역에서는 매력적인 몸매로 간주되는지 경제학자들은 답하기 어려워한다.

가치의 기본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행위라고 보는 새로운 시각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화폐와 상품의 교환만을 다루는 시장경제 바깥의 다른 교환방식에 대해서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그레이버가 ‘인류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업적’으로 꼽는 것이 『증여론』의 저자 마르셸 모스의 이론적 작업이다. 알려진 대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의 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들이 전혀 다른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비록 경제학과 인류학이 서로 상반되는 이론적 시각을 갖고 있지만, 저자는 여기서 모스의 인류학이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유용한 상보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하고 정확한 비판을 담고 있다면, 모스의 작업은 자본주의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형식들을 탐구한 것이기에 그렇다.

두 사람간의 차이점보다는 이러한 협력가능성에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레이버의 요지다.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여러 대목들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비록 인류학 이론사를 검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국내에 소개된 일본의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여러 저작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는 다른 대안적 ‘교환 양식’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라타니의 경우에 자발적이고 자립적인 상호교환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바, 이것은 개개인이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돼 있기에 시장 사회와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호혜적 교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와 닮은 것이었다. 그레이버가 과연 가라타니보다 더 멀리 나간 것인지 나로선 평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건 덜 중요한지도 모른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넘어선 그 실천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것은 저자 자신이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주창하며 여러 급진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하므로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첨언이지만.

이현우 서울대 강사·노문학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근간) 등의 저서와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등의 논문이 있으며, 번역 서평에 관심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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