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0:50 (목)
[해외통신] 톨킨이 주선한 '대중문화와 아카데미의 만남'
[해외통신] 톨킨이 주선한 '대중문화와 아카데미의 만남'
  • 이택광/영국통신원
  • 승인 2002.03.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3-22 14:44:57

과연 대중문화와 아카데미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따르자면 이런 화해의 제스처는 일종의 가식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대중문화와 고급문화, 또는 세속주의와 아카데미즘을 가르는 기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8세기 이후 급격하게 임계선을 돌파한 대중문화의 범람은 일부 엘리트주의자들에게 생활세계로부터의 퇴거를 강요했고, 이런 상황이 이분법적 발상을 부추겼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이런 퇴거에 따른 모더니즘의 긍정적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이런 모더니즘의 긍정성은 윈덤 루이스나 에즈라 파운드, 그리고 T. S. 엘리어트의 파시즘 지지라는 하나의 정치적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국 현실로부터 완전히 일탈한 매끈한 미학주의의 세계는 그 자체가 표방하는 중립성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아이러니를 설명해주는 최근 현상이 바로 J. R. R.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을 둘러싸고 회전하는 학술 담론들일 것이다. 옥스퍼드대 문헌학 교수이자 ‘베오울프’ 연구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통했던 톨킨이 정작 썼던 것이 조이스나 로렌스 같은 고급문학이 아니라 재생지에 인쇄돼 구멍가게에서나 팔리는 대중 판타지 소설이었다는 것은 흥미를 자아낸다. 게다가 이런 모순적 측면에 대한 본격적 학술논의가 최근 영국학계에서 하나 둘씩 등장하고 있어서 더욱 관심을 끈다. 그 동안 주로 저널리즘이나 전기작가들에 의해서 활발히 조명됐던 반면, 본격적인 학술적 논의를 만나지 못했던 톨킨의 삶과 문학은 이제 착실하게 제도화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제도화는 아카데미즘 속으로 하위문화형식이 편입되는 양상을 띠며 전개되기 마련인데, 세속적 차원에서 하위 문화형식이 대중문화의 일환으로 低流하다가 마침내 주류 문화의 일종으로 흡수되는 메커니즘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문화변동은 집단적 유토피아 충동의 발현과 연관이 있는데, 하위문화장르들이 주기적으로 주류 문화의 퇴조에 따라 역사의 전면으로 귀환하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 전망이 불투명해질 때라는 것이다. 블로흐의 말처럼 이런 정치적 전망의 난조를 하위문화나 문학장르에 기대어 돌파하고자 하는 노력일까. 2년 전 낭만주의 연구의 대가이자 해체비평의 개척자인 헤롤드 블룸이 편집 발간한 ‘J. R. R. 톨킨: 현대비평의 관점’은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톨킨의 제도화에 대한 일종의 상징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획기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블룸의 윤색을 거친 이 책은 아무래도 몇 가지 점에서 ‘주류’의 강력한 입김을 느끼게 만든다. 예를 들어, 블룸이 ‘반지의 제왕’보다 ‘호빗’을 ‘아동문학’으로 간주하면서 더 방점을 찍는 것은 이런 문화적 유형분류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톨킨이라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를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발전과 테크놀로지화를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참 철이 지난 톨킨의 60여년 전 소설들이 “21세기 대중문화의 기호로서 호출되는 것은 아무래도 이런 문화산업의 번성에 혐의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된 영화 ‘반지의 제왕’을 감독했던 피터 잭슨의 말처럼, 톨킨의 소설은 21세기의 테크놀로지를 기다리며 그 동안 상상력 속에 잠들어 있었던” 셈이라고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영국 학계가 보여주는 톨킨 현상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대중문화와 아카데미즘이라는 일견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이는 범주들을 긴밀한 관계로 다시 복권시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 영국 리즈대에서 톨킨 학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세인트루이스대 교수로 재직 중인 톰 쉽페이는 최근 ‘톨킨: 세기의 작가’란 저서에서, 톨킨의 소설을 “악에 대한 정의뿐만 아니라 그 해결책까지도 제시하는 허무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문화적 하위장르에 내재한 좌절된 유토피아적 욕망을 적절하게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 반문화운동의 상징이자 고대와 중세의 문헌학에 대한 매니아적 관심을 대중적으로 불러 일으켜온 톨킨의 소설이 21세기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이런 좌절 자체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국의 학계가 그 동안 무시해왔던 이 좌절의 흔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퇴행적으로 제기되는 복고주의에 대한 새로운 문화적 대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BBC가 발간한 ‘톨킨: 오디오로 그리는 초상’에서 마이클 홀던과 이안 홀름이 육성으로 말해주는 것처럼,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페어리 퀸이나 라파엘 前派를 능가하는 복고주의의 환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톨킨 자신이 현대문명에 반감을 가지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로 일관했기에 이런 비판을 흘려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더 깊고 풍부한 학술적 비판과 수용을 위해서라도 이런 논의는 앞으로 계속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택광/영국통신원 세필드대 박사과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